<럭셔리> 2026년 10월호

세계를 손목 위로, 월드 타이머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머무는 곳이 ‘한 곳’이던 시대의 시계는 ‘하나의 시간’만 보여주면 충분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대륙을 가로지르면서 손목 위의 시간은 더 이상 하나일 수 없게 됐다. 시계는 그렇게 시간을 표시하는 기계에서 서로 다른 도시와 시간을 연결하는 도구로 영역을 넓혀갔다.

EDITOR 남정화 PHOTOGRAPHER 이호현

100점 한정 생산되는 ‘RM 63-02 오토매틱 와인딩 월드 타이머’ 워치. 유니버설 24시간 타임 디스플레이를 적용한 오토매틱 와인딩 무브먼트 ‘CRMA4’를 탑재했다. RICHARD MILLE.


여러 시간대를 하나의 시계에 담으려는 시도는 국제 여행이 본격화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월드 타이머는 가장 직관적인 해답이었다. 이름 그대로 세계 각 도시의 시간을 한눈에 보여주는 기능이다. 지금 있는 곳의 시간과 다른 한 곳의 시간을 확인하는 GMT나 듀얼 타임과 달리, 월드 타임은 하나의 다이얼 안에 세계를 펼쳐놓는다.
다이얼 가장자리에는 뉴욕, 런던, 파리, 도쿄처럼 세계 24개 시간대를 대표하는 도시 이름이 놓이고, 그 안쪽에는 24시간을 표시하는 디스크가 자리한다. 여기에 중앙의 시침과 분침이 더해진다. 복잡해 보이지만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기준이 되는 도시와 현재 시간을 설정하면 도시 디스크와 24시간 디스크가 서로 맞물리며 각 도시의 시간을 보여준다. 24시간 디스크는 하루에 한 바퀴 회전하며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있도록 밝고 어두운 영역을 나누기도 한다. 하나의 시계 안에서 지구의 하루를 축소해 보여주는 셈이다.

이 구조가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월드 타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루이 코티에Louis Cottier다. 1930년대 제네바의 독립 시계 제작자였던 그는 세계 각지의 시간을 하나의 시계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독창적인 시스템을 고안했다. 여러 시간대를 각각 별도의 바늘로 표시하는 대신 도시명과 24시간 표시를 회전하는 링으로 구성하는 방식이었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늘어놓기보다 다이얼 자체에 세계의 시간을 질서 있게 담아낸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당시 시계 제조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특히 파텍 필립은 코티에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월드 타임 손목시계를 발전시켰고, 1930년대 후반 등장한 ‘Ref. 1415’와 이후 ‘Ref. 2523’ 워치는 오늘날까지 월드 타이머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특히 Ref. 2523의 에나멜 지도 다이얼은 월드 타임의 기능을 넘어 장식적 아름다움과 수집 가치까지 더한 사례다. 세계의 시간을 표시하는 기능이 다이얼 위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월드 타임의 묘미는 복잡한 세계의 시간을 얼마나 간결하게 보여주느냐에 있다. 수십 개의 도시와 24시간이라는 방대한 정보를 작은 손목 위에 올려놓으면서도 착용자는 하나의 다이얼만 바라보면 된다. 월드 타임은 시간을 더 많이 보여주는 기능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하나의 질서 안에 정리하는 방식에 가깝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932년 루이 코티에와 협업해 최초의 월드 타임 시스템을 적용한 레퍼런스 ‘3372’ 시계를 제작했다.


지난 5월, 약 140억 원에 낙찰되며 레퍼런스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파텍 필립의 ‘Ref. 2523 사우스 아메리카’ 월드 타이머. PHILLIPS AUCTION.


여행의 풍경, 시간이 되다

월드 타임의 기본 구조는 오랜 시간 이어졌지만, 그것을 다이얼 위에 풀어내는 방식은 하우스의 성격에 따라 달라졌다. 세계지도를 중앙에 펼치는 브랜드가 있는가 하면, 도시명과 숫자만 이용해 극도로 절제된 구성을 만드는 브랜드도 있다. 같은 세계를 보여주더라도 어떤 풍경을 선택하고 무엇을 강조할지는 시계마다 다르다.

그래서 여행을 하우스의 정체성으로 삼아온 루이 비통에게 월드 타임은 자연스럽게 메종의 언어를 담아낼 필연적 기능이기도 하다. ‘에스칼 월드타임’ 워치는 세계 주요 도시의 이름 대신 24개의 국기를 배치하고, 국기의 문양 안에 말타주 트렁크 라이닝과 다미에 캔버스, 모노그램 플라워 등 루이 비통의 시그너처를 심었다. 세계를 표시하는 기능 자체가 여행에 대한 하우스의 해석으로 바뀐 셈이다.

이토록 복잡하고 많은 정보를 작디작은 다이얼에 모두 담아내려면 변화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리차드 밀 ‘RM 63-02 오토매틱 월드타이머’ 워치는 조작법을 통해 변화를 시도했고 성공했다. 일반적인 월드 타이머처럼 별도의 푸셔를 사용할 필요 없이 베젤을 돌려 원하는 도시를 기준 위치에 맞추면 현지 시간과 나머지 도시의 시간을 함께 설정할 수 있는 시계다. 복잡한 기능을 더하는 대신 여행자가 실제로 시계를 사용하는 순간의 동작을 단순하게 만든 것이다. 세계의 시간을 보여주는 방식뿐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까지 다시 생각한 월드 타이머가 아닌가.

하지만 여행자에게 언제나 세계 전체의 시간 정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런던에 있는 사람에게는 서울과 런던의 시간이 중요할 수 있고, 뉴욕으로 떠난 이에게는 현지 시간과 서울에 남겨둔 가족의 시간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세계의 모든 시간을 보여주는 것보다 지금 나와 관계된 두 곳의 시간을 정확히 보여주는 편이 실용적인 순간도 있다.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듀얼 타임 워치다.


24개 타임 존의 국기를 정교한 미니어처 페인팅으로 구현한 ‘에스칼 월드타임’ 워치. 브랜드 시그너처를 녹인 재해석이 아름답다. LOUIS VUITTON.


두 개의 시간, 하나의 여행

월드 타임에서 시선을 조금 좁히면 듀얼 타임이 있다. 세계 전체를 하나의 다이얼에 펼쳐놓는 대신, 여행자에게 필요한 두 개의 시간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떠나온 곳의 시간과 지금 머무는 곳의 시간. 세계를 한눈에 조망하던 시선이 내가 서 있는 위치와 돌아갈 곳으로 좁혀지는 것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올해 출시한 ‘오버시즈 듀얼 타임 카디널 포인트’ 워치로 듀얼 타임의 의미를 한 단계 확장했다.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네 가지 컬러의 다이얼로 선보인 이 모델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보여주는 듀얼 타임 기능에 ‘방향’이라는 개념을 더한다. 기능의 중심에는 ‘칼리버 5110 DT/3’가 있다. 두 번째 시간대를 표시하는 핸즈를 통해 떠나온 곳의 시간과 현재 머무는 곳의 시간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고, 낮·밤 인디케이터가 두 번째 시간대의 시간을 읽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이 시계에서 듀얼 타임은 단순히 두 개의 시간을 보여주는 기능뿐만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치다.

월드 타이머가 세계의 시간을 한눈에 펼쳐놓았다면, 듀얼 타임은 그 세계 안에서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두 곳을 골라낸다. 그리고 오버시즈 듀얼 타임 카디널 포인트는 그 두 시간에 다시 방향을 부여한다. 세계를 읽는 방식이 ‘몇 시인가’에서 ‘어디에 있는가’로 넓어지는 순간이다.

세계가 연결될수록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의 수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 끝에서 필요한 것은 반드시 더 많은 시간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세계 전체를 한눈에 바라보는 월드 타임에서 나와 관계된 두 곳에 집중하는 듀얼 타임 중 당신에게 가장 매력적인 세계는 어느 쪽인가.


나침반의 네 방향 중 동쪽의 블루 컬러를 다이얼에 적용한 ‘오버시즈 듀얼 타임 카디널 포인트’ 워치. 티타늄 소재라 극도로 가볍고 오렌지 컬러 포인트의 가시성이 돋보여 여행을 위한 기능이 강조된 듀얼 타임 워치다. VACHERON CONSTANTIN.



COOPERATION 루이 비통(3432-1854), 리차드 밀(512-1311), 바쉐론 콘스탄틴(1877-4306), 필립스옥션(philli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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