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9월호

두리 배요환 셰프의 전통주 코스

한가위, 차례상 앞에 둘러앉아 술 한잔을 나누던 오랜 풍경이 있다. 집집마다 다른 손맛으로 빚던 술과 그 술에 어울리는 안주를 골라내던 감각. 오래전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이 술상의 문법이 지금 다이닝의 페어링 한잔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EDITOR 김민지 PHOTOGRAPHER 김잔듸


요즘 파인다이닝에는 와인 리스트 옆에 또 하나의 페어링 메뉴가 놓인다. 막걸리, 약주, 증류주 등으로 구성한 전통주 페어링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명절이나 제사상에서나 만나던 술이, 이제는 셰프가 직접 도수와 산미를 계산해 요리와 짝짓는 대상이 됐다.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긴 유행이 아니다. 술과 음식을 정교하게 짝짓는 감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감각의 출발점을 따라가면, 집집마다 빚어 안주와 함께 내던 우리네 술상에 가닿는다.

조선시대 술은 사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빚는 것이었다.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에서 술 빚는 법을 상세히 기록하며, 집안마다 누룩과 물, 발효 시간이 조금씩 달라 그 맛이 저마다 다르다고 적었다. 이렇게 집에서 빚은 술을 가양주 家釀酒라 불렀는데, 반가에서 가양주는 혼자 마시는 술이 아니라 늘 상 위에서 완성되는 술이었다. 술과 안주를 함께 낸 이 상차림을 술상이라 했고, 무엇을 안주로 올리느냐는 술을 빚는 솜씨만큼이나 집안의 격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반가의 술상은 계절과 술의 성격에 따라 안주를 달리 냈다. 도수가 낮고 단맛이 있는 술에는 육포나 어포처럼 짭짤한 안주를, 독한 소주에는 기름진 전이나 편육을 곁들여 술의 자극을 눅였다. 봄에는 화전과 진달래술을, 가을에는 국화전과 국화주를 함께 내는 절기별 술상도 있었다. 같은 청주라도 어떤 집은 육포를, 어떤 집은 나물무침을 곁들였고, 그 조합의 차이가 곧 그 집안의 취향이자 살림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이 유구한 흐름은 근대에 들어 급격히 단절됐다. 1909년 대한제국의 주세법 시행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들어 자가 양조가 사실상 전면 금지된 것. 집에서 술을 빚는 행위 자체가 단속과 과세의 대상이 되면서, 수백 년간 이어지던 집집마다의 술맛과 술상 문화는 밀주라는 이름으로 몰려 자취를 감췄다. 광복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식량 부족으로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로 술을 빚는 것이 오랫동안 제한됐고, 막걸리는 밀가루로, 청주는 값싼 재료로 대체되며 본래의 맛과는 거리가 먼 형태로 대중화됐다. 가양주의 다양성은 표준화된 몇 가지 술로 좁혀졌으며, 그 자리를 소주와 맥주 같은 현대적 주류가 빠르게 채웠다. 이 흐름이 다시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서다. 2000년대 이후 주세법 규제가 단계적으로 완화되며 소규모 양조장 설립이 가능해졌고, 젊은 양조인들은 잊힌 조선시대 양조법을 문헌에서 찾아 복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식 문화가 더해지면서 전통주도 더 이상 독하고 낯선 술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낮은 도수와 산뜻한 풍미, 탄산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며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술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왜 이 코스에 전통주가 들어가 있느냐고 물으시면 ‘이 메뉴에는 이게 제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게 답이에요.”

두리 배요환 셰프 COOPERATION



‘두리’를 이끄는 배요환 셰프.


틀에 박히지 않은 한식, 두리 DOORI

서울 용산구에 자리한 파인다이닝 ‘두리’는 배요환 셰프와 이효재 매니저 부부가 함께 만든 공간이다. <2026 미쉐린 가이드>에 이름을 올리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두리는 이제 곧 2주년을 맞는다. 레스토랑 이름은 한식과 양식, ‘둘’이 만났다는 의미이자 부부 둘이 함께 만든 레스토랑이라는 뜻, 그리고 반려견의 이름이기도 하다. 미식을 어렵고 엄숙한 것으로 만들기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편안한 경험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이 이름에 겹겹이 담겨 있다. 배요환 셰프는 처음부터 요리를 업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뒤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나라별 와인과 요리를 한식에 접목한 소셜 다이닝을 시작했고, CJ제일제당의 ‘퀴진 프로젝트’를 거쳐 지금의 두리를 열었다. 정식으로 요리를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에게 기존 파인다이닝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됐다.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미화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 공부를 정말 많이 해요. 스킬 자체를 익히기 위해서라기보다, 저희 메뉴가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이처럼 두리의 요리는 익숙한 한국의 맛을 낯선 모습으로 보여주는 데서 출발한다. 메뉴판에는 완성된 요리의 이름 대신 농어나 매생이, 초석잠 같은 식재료만 죽 나열되어 있는데, 배요환 셰프는 이들을 하나의 공연에 등장하는 ‘출연진’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나올지 예상하게 만든 뒤 그 기대를 비틀어 전혀 다른 형태의 요리를 내놓는 방식은 마치 하나의 공연을 보는 경험에 가깝다. 막상 맛을 보면 식재료가 지닌 본래의 맛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익숙한 맛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합 안에서 다시 발견하게 하는 것. 그 방식은 전통주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요리에 페어링한 한영석 청명주와 쑥크레.


미역국 베이스의 매생이 소스와 송어알을 곁들인 농어구이.


멸치 육수를 베이스로 한 찰보리 리소토 위에 홍새우를 올리고 허브를 얹어낸 메뉴.


익숙함에서 발견하는 새로움

두리에서 전통주는 와인을 대신하는 선택지가 아니다. 메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을 찾는 과정에서 와인과 전통주를 처음부터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본다. “왜 이 코스에 전통주가 들어가 있느냐고 물으시면 ‘이 메뉴에는 이게 제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게 답이에요.” 셰프와 소믈리에를 겸하는 배요환 셰프에게 페어링은 음식에 소스 하나를 더하는 것과 비슷하다. 술이 음식 옆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입의 맛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재료가 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통주가 한식과 만나는 이유도 자연스럽다. 배요환 셰프가 전통주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 것은 ‘누룩’이다. 어떤 누룩을 쓰느냐에 따라 술의 향과 맛이 달라지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발효의 뉘앙스는 된장과 간장, 장아찌처럼 발효를 바탕으로 하는 한식의 맛과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는 전통주를 하나의 큰 카테고리로 묶기보다 각각의 개성을 살펴 음식과 연결한다. 꽃과 과실을 연상시키는 ‘한영석 청명주’는 가벼운 생선 요리에, 솔티한 인상의 ‘맑은바당’은 해산물에, 깊은 보디감을 가진 ‘두두물물’은 묵직한 메뉴에 잘 어울리는 편. 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코스 후반으로 갈수록 힘을 발휘한다.

이번 시즌 두리가 선보인 농어 요리는 그런 페어링의 방식을 잘 보여준다.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구워낸 농어 아래 초석잠 장아찌와 귤즙을 깔고, 하몽 자투리로 끓인 미역국 베이스의 매생이 소스를 더했다. 여기에 한영석 청명주를 곁들이면 참외와 청포도, 복숭아, 매실을 연상시키는 과실 향과 산미가 음식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셰프가 이를 레몬 제스트에 비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술이 입안을 씻어내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소스처럼 음식의 풍미를 한 겹 더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홍새우를 올린 찰보리 리소토에는 쑥을 차처럼 덖어 만든 막걸리 ‘쑥크레’를 짝지었다. 쑥의 뉘앙스는 실제 허브와 잘 어우러지고, 막걸리 특유의 밀키한 질감은 부드러운 리소토와 맛의 균형을 이룬다. 은은한 단맛은 홍새우의 비스큐 풍미를 감싸며 음식과 술의 경계를 흐린다. 배요환 셰프가 애정하는 전통주 역시 이런 방향과 맞닿아 있다. 무량수 양조장의 스파클링 전통주 ‘쌀SSAL’은 쌀을 기반으로 샴페인과 유사한 방식을 통해 탄산감을 만든 술로, 이 술에서 시작해 약주와 탁주, 디저트 전통주까지 이어지는 모던 전통주 전용 페어링 코스를 구상 중이다. 결국 두리가 전통주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오래된 술의 새로운 얼굴인지도 모른다. 전통주를 ‘독하고 오래된 술’이라는 이미지에 가두지 않고, 한식의 발효와 지금의 미식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재료로 바라보는 것. 익숙한 재료를 낯선 방식으로 풀어내는 두리의 음식처럼, 한 잔의 전통주 역시 우리가 알고 있던 한식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각 요리에 맞는 다양한 접시와 글라스가 놓여 있는 레스토랑 한편.


앉아 있는 손님의 눈높이와 맞추기 위해 좌석의 단을 올렸다.



COOPERATION 두리(0507-1409-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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