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M> 2025년 4월호

‘함께 사는’ 이야기, 신유청

삶은 종종 시련의 연속으로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는 늘 위안이 되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이야기의 본질에 집중하는 신유청 연출의 작품은 거친 풍랑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최근 굵직한 작품을 내놓으며 관객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는 그를 만나 세상이라는 격랑을 헤쳐갈 힘이 되어줄 무대의 소중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EDITOR 이연우 PHOTOGRAPHER 이경옥

신유청  최근 연극계의 ‘보증 수표’로 불리는 연출가. 흥행은 물론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주목받고 있다. 계원예고와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거쳐 2008년부터 연극 연출가로 활동해왔으며, 2020년 연극 <그을린 사랑>으로 제56회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을 수상하며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연출작으로 <녹천에는 똥이 많다>, <와이프>, <엔젤스 인 아메리카>, <테베랜드>, <햄릿> 등이 있으며 오는 4월 <시련>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와 <햄릿>에 이어 철학적 사유가 담긴 2인극 <테베랜드>까지 화제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2월에 막을 내린 <테베랜드> 이후 곧바로 연극 <시련>에 돌입했는데요. 숨 가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의도치 않게 휴식할 틈 없이 연달아 작품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전체적인 세팅과 공연장 스케줄에 따라 저를 맞춰 넣을 수밖에 없지요. 작품을 연달아 할 때는 효율적으로 일정을 정리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사실 작품을 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어요. 각각 다른 시대, 다른 배경, 다른 인물들을 마주하게 되거든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고 펼쳐내는 일은 언제나 꾸준히 즐겁습니다.


기세 넘치는 전진의 원료는 ‘즐거움’이군요.

그렇습니다. 여러 작품을 오가다 보면 가는 실처럼 이어진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돼요. 각각의 시대를 각각의 모습으로 그리지만 결국에는 모두 ‘인간’을 다루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한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죠. 시공간을 넘어 이어지는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 신기하고 또 재미있어요. 저를 비롯한 창작자들은 작품마다 존재하는 각각의 세계를 더 큰 세계로 담아내려는 노력을 하는 거고요. 그러면서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도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작품의 연출 제안이 쏟아질 것 같은데,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렇게 많은 제의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웃음) 제작사에서 저를 찾을 때는 제가 잘할 거라 생각하고 기대하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이제껏 제가 내놓은 결과를 보고 저를 한계 짓는 과정이 있겠죠. 그러니 제 스스로 새로움을 찾아 나서야죠. 저도 처음에는 낯선 작품을 대하면 ‘이건 불리할 것 같다’라는 계산을 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의식적으로라도 익숙함을 기피하고, 제 자신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알고 지내던 교수님이 제가 연출한 작품을 보러 오셨기에 극이 끝난 후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요. 첫마디가 “이것도 신 연출이 했어? 전혀 몰랐네”였어요. 저는 그 말이 무척 기쁘고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조금씩 다른 작품들을 만나며 저조차 모르는 저를 계속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간의 연출작을 보면 좀처럼 쉬운 이야기가 없습니다. 다소 까다롭고 묵직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로 관객들에게 헤어나오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왔죠. 신유청의 작품이라고 하면 일단은 고통, 비극, 운명 같은 단어들이 생각날 정도니까요.

확실한 건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합니다. 힘듦을 겪고 싶은 게 아니라(웃음) 인간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이 흥미롭고 또 의미 있게 느껴져요. 고통과 시련을 통해 오히려 사람을,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무대 위에 펼쳐진 비극을 보는 동안 관객들이 한껏 슬퍼하고 한껏 비통해하길 바랍니다. 또한 살면서 잃어버린 감정을 가깝게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연극을 본다는 건 공감을 만끽하는 경험이거든요.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공감을 찾는다면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2023년 한국 초연에 이어 1년 만에 두 번째 시즌을 선보인 연극 <테베랜드>는 탄탄한 텍스트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사유와 탐구의 시간을 안내했다.


연출가로서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하긴 했죠. 그런데 막상 뛰어들고 나선 종종 형편없는 순간들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세상은커녕 나조차 바꿔내기 쉽지 않음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의욕을 잃어버리기도 했어요. 그래도 찬찬히 눈앞의 현실을 헤쳐오다 보니 ‘연극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던 20대 때의 원대한 꿈은 옅어졌지만, 옳다고 믿는 방향을 계속 바라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우리가 완벽하지 않고 미흡한 점이 많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요. 연극은 반복해서 메시지를,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어쩌면 형식적인 행위일지라도 그 형식을 반복한다는 사실이 귀중한 것 같아요.


연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글을 쓰는 작가, 아낌없이 표현하는 배우, 상상을 뛰어넘는 무대연출 그리고 드라마틱한 조명과 음향까지. 연극은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탄생한 결과물입니다. 본격적으로 연출을 시작하고, 뛰어난 전문가들을 만날수록 ‘과연 연출이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이 커지더군요. 오래 일한 선배들에게도 묻고 유명한 해외 연출가와 일한 이들에게도 물어봤죠. 저마다 다른 답이 돌아오더라고요. 그중에서 가장 마음이 간 답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어디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지, 한곳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일러주고 안내하는 사람이요. 모두가 각각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를 만들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을 잇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물론 무척 어려운 일일 테지만, 늘 구름 위가 아닌 땅 위에 정확히 두 다리를 내딛고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출자가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맡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도 반드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 자신만의 특별한 기준이 있을까요?

저는 가능하면 작품에 제 해석을 더하지 않으려 합니다. 작품 본연의 색, 원래의 스타일을 잘 구현해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원하는 ‘잘된 공연’은 공연을 함께한 모든 이가 최초의 작가가 가진 마음에 가닿는 것입니다. 공연을 만든 이를 비롯해 전 관객이 작품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 작품이 힘 있게 굴러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최근 마무리한 <테베랜드>는 그런 점에서 무척 만족스러운 작품인데요. 연극을 만드는 모든 이가 두루뭉술한 세계 속에서 작가의 마음을 찾아내고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굉장히 애를 썼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작가 이상으로 이 작품 자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죠. 관객들도 그 진심을 충분히 느꼈을 거라 믿습니다.


최근 들어 업계에서나 대중적으로나 크게 주목받는 연극 연출가로 자리 잡았는데요. ‘대학로의 봉준호’라는 별명으로도 불립니다. 이러한 호평과 기대가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는지요?

같은 해에 백상예술대상에서 같이 상을 받으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아요. 잠깐 그러다 사그라질 줄 알았는데 어쩌다 요즘 또 불거져서 조금 민망합니다.(웃음) 작품에 임할 때의 부담감은 솔직히 크진 않아요. 좋은 평가를 받거나 이름이 알려지고자 애를 썼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냥 하나의 현상인 거니까요. 물론 어느 정도 의식은 하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작품 자체에만 몰입하려 합니다.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던지는 걸까’, ‘이 작품이 오늘날 세상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것들에 골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스타일이 더해지면서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요.


연극 무대에 매료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예고를 다녔는데, 연극을 할 생각으로 진학한 건 아니었고 일종의 도피처로 선택한 거였어요. 어쨌든 그곳에서 연극을 접했고 2학년 때 배우로 무대에 서게 됐어요. 아주 작은 비중의 역할이었고 3막 끝에 잠깐 나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공연이 진행되는 소극장 바깥으로 나가면 큰 빌딩이 늘어서 있고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곳이었는데, 제 차례를 기다리다가 잠깐 문을 열고 나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빌딩 사이 길가에 서서 지금도 이해가 안 갈 만큼 펑펑 울었어요. 갑자기 얼마 되지도 않는 인생의 지난 시간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무대에 올라갔고, 커튼콜 때 또 엉엉 눈물을 흘렸어요. 글쎄,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그 이후로 연극을 계속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거예요.


배우 조승우의 연기 경력 24년 만의 연극 데뷔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연극 <햄릿>은 전 회차 전석 매진 기록을 세우며 압도적 찬사를 이끌어냈다.


배우로 연기를 할수도 있었겠네요. 그런데 연출가로 전면에 나선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연기는 뭔가 귀찮은 점들이 많더라고요. 맡은 역할에 맞춰서 머리 모양도 바꿔야 하고(웃음) 연기를 잘 못해서 많이 혼나기도 했고요. 그러다 연출가 김달중 선생님을 알게 되면서 선생님처럼 되고 싶단 마음에 연출로 나선 거예요. 사실 대학 졸업하고는 연극과 관련된 뚜렷한 일을 하지 않고 많이 놀았어요. 대학로 연우소극장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15년가량을 연극의 언저리에서 ‘잘’ 쉬었죠. 본격적으로 연출에 뛰어들었을 때 제 나이가 마흔이었어요. 누군가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늦게 시작해서 다행이라 여겨요. 20대 때는 제 능력이나 저를 둘러싼 배경에 대한 과신 같은 게 분명 있었어요. 그런데 긴 시간을 보내고 나니 결국에는 ‘나’만 남게 되더군요. 흑빛 바다 깊숙이 가라앉는 동안 들뜬 열망이나 섣부른 자만심 같은 것들이 빠져나간 거죠. 그렇게 남은 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며 제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연극은 어떤 모습인지 솔직하게 그려볼 수 있었어요.


무대의 어떤 점이 계속해서 당신을 사랑에 빠지게 만듭니까?

사실 연극이라기보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만난다는 건 인간을 알아가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다 같이 한 공간에 앉아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그 사실이 무척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이 좋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지요. 복잡하고 힘들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 일이 무수히 일어나는 세상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같이 박수를 친다는 사실. 그게 너무나 대단하고 멋진 거죠. 팬데믹을 겪으면서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비록 띄엄띄엄 자리했지만 무대를 향해 같은 시선을 보내고 감정을 공유하는 관객들을 보며 ‘과연 이곳에 깃든 마음은 뭘까’ 궁금해질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앞으로 꾸준히 ‘함께 존재함’을 느낄 수 있는 연극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이건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그런 문화일 거예요.


지난해 연출하신 작품 <햄릿>의 대사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연극이야말로 왕의 양심을 낚아챌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연극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햄릿은 굳건히 믿었던 것 같아요. 위선이라는 탈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난 이야기가 인간의 숨겨진 양심을 들춰낼 수 있다는 것을요. 거짓된 말, 떠도는 말들이 이야기와 연극 안에서는 진실에 닿게 만듭니다. 저는 연극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분들이 그냥 ‘연극 한 편 잘 봤다’가 아니라 ‘나를 만났다’, ‘우리의 이야기를 만났다’란 생각을 하며 돌아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연출가로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함께 사는’ 연극을 만들고 싶습니다.




연극 <시련>

20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 아서 밀러의 현대 고전 명작. 매카시즘 시대의 광기를 비판하며 ‘마녀재판’이란 소재를 통해 억압된 사회구조와 집단 안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인간의 삶과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기간: 4월 9~27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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