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Visible 8’(2024)과 세라 볼Sarah Ball의 ‘Gabe’(2022) 가운데에 서 있는 박희경 대표.
박희경 예술 작품, 공예품 등 사물과의 관계맺기를 통해 내면을 발견하고 함께 공유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 파인딩스키핑Finding’s Keeping을 이끌고 있다.
파인딩스키핑에 들어서자마자 박희경 대표에게 우스갯소리로 건넨 한마디. “방배동의 사치 갤러리네요.” 눈에 익은 유명 작품들도 있었지만, 빛의 결을 따라 시선과 발걸음을 옮기는 족족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나타나 ‘반전의 매혹’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김구림, 데이비드 호크니, 심문섭, 나라 요시토모, 이배, 이상남, 전광영, 최병소, 최영욱 등 거장의 작품과 나란히 놓인 신진·중진 작가들의 작품들. 박희경 컬렉터의 공간은 갤러리와 스튜디오의 경계를 허물며, 세대와 스타일을 아우르는 컬렉팅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벽면마다 다른 시간과 감성이 겹치며, 작품들은 마치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이를 따라가다 보니, 한 사람의 시선과 취향이 쌓여 만들어진 살아 있는 ‘컬렉션의 초상’이 드러났다.
파인딩스키핑의 첫인상은 갤러리 수장고였어요.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이 한 공간에 있다니, 대표님의 컬렉팅은 어떻게 출발했나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쌓아온 경험들이 결국 하나의 줄기로 이어지는 순간이 있나 봐요. IT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던 저는 와인을 향한 열정을 티켓 삼아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와인과 프렌치 요리를 공부하며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던 중 예기치 못한 대지진으로 귀국길에 올랐어요. 오랫동안 서양 음식을 접하며 몸이 지쳐 있었던 탓일까요. 자연스럽게 건강한 식재료와 요리에 관심이 생겼고, 우연히 파주 헤이리에 있는 쌈지 논밭예술학교에서 자연 요리 연구가 문성희 선생님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파주로 여행을 떠나듯 찾아가 요리를 배우고, 논밭 사이에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일은 매우 즐거웠어요. 그곳에서 여러 예술 활동을 접하면서 미술에 흥미를 느꼈죠. 더욱이 미술에 재능을 보인 큰아이 덕분에 주변 사람들과 미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미술을 향한 마음의 문이 열리더군요. 그렇게 미술을 접한 지 10년쯤 지난 어느 날, 쌈지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던 분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림 본 지 10년이면, 이제 한 점 구매해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제 컬렉팅의 막이 올랐습니다.
어떤 작품이었나요?
이영지 작가의 ‘너라는 하루를 살아’(2020)를 큰아이 방에 걸어주려고 소장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작품 가격이 3배 이상 오른 거예요. 마침 미술 시장도 호황이었고. 그때 문득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본격적으로 컬렉팅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웃음) 컬렉터 5년 차인 현재, 200여 점 소장하고 있어요. 보통 한 작가의 작품을 두 점씩 구매하는 편입니다.
두 점을 구매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라기보다는, 작가들이 시리즈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이에요. 작업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시리즈 안에서도 캔버스마다 결이 달라진다거나, 주제 또는 기법이 발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죠. 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은 것이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컬렉팅은 단순한 소장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의미예요.
작가와 작품에 관한 정보는 어떻게 얻나요?
첫 1년 동안은 매주 옥션에 방문했습니다. 프리뷰 전시를 보기 위해,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고 낙찰받은 작품을 수령하러 가기 위해서요. 옥션은 한꺼번에 다수의 작품을 접할 수 있어서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었어요. 경매를 통해 미술 시장의 분위기를 읽고,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는 눈을 길렀습니다. 이후에는 아트페어가 열릴 때마다 빠짐없이 찾아갔고, 미술 관련 수업을 들으며 컬렉팅에 대한 식견을 넓혀갔어요. 요즘은 옥션보다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갤러리에서 작품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컬렉터 5년 차라고 하면, 흔히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고 하잖아요. 물론, 대표님께선 200여 점의 작품을 갖고 계시지만···.(웃음) 여전히 갤러리 진입 장벽이 높은가요?
맞아요. 기존 고객이 아니면, 정확한 작품 정보를 전달받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최근엔 컬렉터 모임이나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편이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작가를 후원하는 자세로 컬렉팅에 접근하는 태도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니 점점 갤러리들도 편하게 다가오고, 좋은 작품을 소개받는 기회도 늘어났어요.
“ ‘여기서 작가 생활을 멈추면 어떡하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해요.
그래서 오래도록 창작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요.”
근래에 컬렉팅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서원미 작가의 ‘카우보이’ 시리즈 중 한 작품이요. 본디 인물화를 선호하지 않았는데, 캔버스를 휘감은 강렬한 주황빛이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누군가의 얼굴이 유쾌함과는 거리가 있나 봅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작품으로 마주하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인물화는 감상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을 유도하는데, 저는 그런 시선이 오히려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물화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큰 영향을 미친 건 세라 볼Sarah Ball의 작품입니다. 그의 인물화는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렸음에도 인물의 생동감이 전해졌어요. 작품을 구매할 당시 저도 작품 속 인물처럼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와 유대 관계가 생기면서 틈만 나면 인사를 건네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장파 작가의 작품도 빼놓을 수 없어요. 작가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강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눈빛에선 따스함이 묻어나 위로받는 감정이 듭니다.
집무실이 있는 2층뿐만 아니라 건물 1층과 지하 공간에도 작품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작품을 관리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몇 해 전, 서울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지하에 보관하던 작품들이 물에 잠기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양수기를 동원해 직접 물을 빼냈지만, 완전히 정리하는 데만 무려 3주나 걸렸어요. 그동안 작품들은 계속 물에 잠긴 상태였죠. 이후 피해를 입은 작품들을 복원하려 노력했지만, 김혜련 작가의 한지 작품은 원래 상태로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하지훈 작가의 유화 작품은 보수를 거쳐 되돌아왔어요.
파인딩스키핑 곳곳에서 이상남 작가의 작품이 보이더군요.
우연히 이상남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면서 맺은 인연이 계속 이어졌어요. 작가의 개인전 때 제가 주도해 파티를 빙자한 팬 미팅을 열었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총 6점 소장하고 있는데, 볼수록 정교한 기법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에요. 때로는 현대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여담이지만, 이상남 작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영화 <미드나이트 인 파리>처럼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미술계의 산증인이시라. 박서보 선생님께 도움을 받았던 일, 따끔하게 혼난 에피소드는 기본이고, 젊은 시절 특히 영배와 밤새 술을 마시며 작업에 대한 고민을 나눈 일화도 들었죠. 그런데 가장 재밌었던 건, 당시 그 누구도 영배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영배가 바로 이배 작가의 본명, 이영배였더라고요.(웃음)
여기저기에 컬렉팅 소식을 묻는데, 대표님께서 젊은 작가를 후원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앞서 작품으로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본다고 했잖아요. 작품을 보노라면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이런 작품을 했을까?’ 등 궁금증이 절로 생겨요. 원로 작가들은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자료가 축적되어 있지만, 신진·중진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덜하잖아요. 분명 알면 알수록 매력이 배가되는 작업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끔 ‘여기서 작가 생활을 멈추면 어떡하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해요. 그래서 오래도록 창작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어요. 처음 작품을 구매할 때는 시장가치와 가격 상승 가능성을 고려했지만,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게 된 지금은 응원의 개념으로 컬렉팅하고 있어요. 훗날 소소하더라도, 이들 작품을 통해 미술사적으로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고 싶다는 작은 욕심도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바람의 원동력이 된 문장이 있을까요?
갓 컬렉팅에 입문해 눈에 불을 켜고 예쁜 작품만 찾던 시절, 아트선재센터의 전시 <서울 웨더 스테이션>(2022)에서 전준호 작가의 “예쁜 것만이 예술이 아니다”라는 말이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주었어요. 그 순간,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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