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식 그래픽디자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작업을 전개하는 아티스트. 자신의 작업을 완결된 서사로 마무리 짓지 않고, 과정 자체를 탐구하는 태도를 통해 작품을 하나의 ‘잠재적 가능성’으로 끊임없이 확장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헤릿 릿펠트 아카데미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국 뉴헤이번의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그래픽 디자인 석사과정을 마쳤다.
허를 찔렸다. 그래픽디자이너의 전시라 해서 과거 포스터 작업이 공간을 수놓을 것으로 지레짐작했는데, 아니었다. 파운드리 서울의 정방형 공간은 나무와 실크스크린, 천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인쇄소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인쇄 공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까지 들려온다. 찬찬히 둘러본다. 작품 사이사이를 거닐 때마다 글씨와 도트, 레이어와 바랜 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이내 깨닫는다. 개인전
그래픽디자이너의 꿈은 언제부터 꾸셨나요?
중학교 때부터 스케이트보드, 만화 등 서브컬처에 빠졌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티셔츠 디자인과 책 편집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죠. 이는 그래픽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손’이 중요한 매개체로 보이네요.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마우스를 클릭할 때도 손을 사용하잖아요?
스케이트보드 문화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가운데 자유로움이 있어요. 스텐실과 페인트 작업을 예로 들면, 직접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행위를 통해 저만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죠. 스스로에게 선사한 창의적인 즐거움이 그래픽디자인을 매개로 좋아하는 무언가를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한국과 네덜란드에서 학사과정을,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수능을 마친 뒤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장 빨리 입학할 수 있는 학교에 지원했어요. 예술 학교라는 점, 자매결연을 맺은 외국 학교가 있는 점에 매료됐죠. 졸업 후 여행을 하면서 ‘한국에서의 치열한 경쟁보다 책에서 보던 환경에서 공부하는 편이 낫다’라는 결론을 다시금 내렸습니다. 네덜란드 학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점도 영향을 미쳤고요. 이후 미국에 간 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어요. 석사과정을 한다고 저의 직업적 정체성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듯했고 비싼 학비도 걱정됐지만, 큰 캠퍼스를 가진 종합대학교를 향한 저의 로망이 모든 우려를 씻어냈습니다.
몸소 체험한 네덜란드와 미국의 디자인 스타일, 교육 시스템은 어떻게 달랐나요?
나라마다 학교마다 성격이 달라서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워요. 도제식 교육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고. 제가 다닌 네덜란드 학교는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았고, 자율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로 인해 학교가 상업적이지 않고 학생 중심으로 운영되는 점도 눈길을 끌었죠. 이곳은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연관된 실험적인 작업이 활발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기존 스타일과 다르게 할 수 있을지’를 열렬히 고민했고요. 교육은 개념적이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주제를 던지고 학생들이 해석해 작업하도록 했어요. 반면, 미국 학교는 직업적 맥락에서 디자인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실용성과 상업성을 중심에 둔 접근법, 산업과의 연결성을 역설했어요. 캠퍼스가 큰 탓에 제작 환경과 지역사회와의 유대가 약하다는 느낌도 받았고요.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디자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또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 짓지 않는 수업이 궁금한데요?
디자이너 율리아 보른Julia Born의 수업이 기억에 남아요. 디자인의 기능을 부각한 교육철학이 와닿았거든요. 현대무용 안무가와 함께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워크숍이었는데, 그룹마다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그 내용을 완벽히 전달하는 문서를 제작하는 것이 과제였어요. 문서를 완성하기 위해선 레이아웃, 이미지, 타이포그래피 등의 디자인 요소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이후 그룹끼리 문서를 교환한 다음, 이를 보며 퍼포먼스를 펼쳤어요. 당시 퍼포먼스가 문서와 유사하지 않으면, 그 디자인은 정보 전달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디자인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순간이었죠.
한 인터뷰에서 하셨던 “디자인은 상업적”이란 문구에 이제야 무릎을 치네요.
“돈을 버는 작업과 포트폴리오 작업을 분리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요.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말이지만, 저는 둘의 경계를 허물고자 고민하고 노력했습니다. 의뢰한 사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본질적 역할이잖아요. 즉, 디자인은 태생이 상업적이라는 뜻이죠.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디자이너가 충분히 창의적일 수 있다고 봐요. 자율성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직업적인 틀을 강조하는 환경을 모두 겪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한국 그래픽디자인 신으로 돌아왔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어요.
네덜란드 교육이 (웹 디자인, 작가, 타이포그래피 등) 학생으로 하여금 자신만의 영역을 개발하도록 독려한다면, 한국은 여전히 정형화된 지침이나 결과물에 비중을 두는 듯해요. 돌아보면, 단 하나의 고유한 작품이 아닌, 대량생산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활용해 가치를 창출하는 저의 디자인이 신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런데도 한국 그래픽디자인 신에는 도시와 사람의 빽빽한 밀도에서 기인한 치열한 에너지가 흐릅니다. 디자이너 대다수가 뛰어난 기술과 실행력을 갖춘 까닭에 경쟁이 뜨겁죠. 그래서 기술적으로 완벽해야 안심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요. 그러나 기술적으로 훌륭한 작업을 빠르게 구현하는 능력은 다른 나라 디자이너가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한국만의 강점이기도 합니다.
현재 파운드리 서울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그런 해석도 재밌네요.(웃음)
전시에서 기존 포트폴리오를 소개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이전 답변의 연장선에서,
앞서 ‘디자인은 상업적’이란 말과 관련해 드렸던 질문으로 돌아가면, ‘창의적일 수 있다’라는 답변을 하셨는데요. 물론 직설적인 결과물도 있지만, 저는 작가님의 작업 대부분이 사유하게 만들어 보는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제 작업은 작품이 놓이는 상황과 그것이 불특정 다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돼요. 당연히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바를 우선시하지만, 동시에 결과물이 만들어내는 의외성과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마주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순간 작품이 완성된다고 믿어요. 예로,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 포스터는 청자를 단색 실루엣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이 사유하는 상황을 조성하고자 했어요. 대학원을 졸업할 때는 작업 데이터를 담은 SD 카드를 투명 레진 안에 봉인했습니다. 이 데이터를 게재한 책도 함께 선보였으나, 이미지를 매우 작게 인쇄해 제대로 볼 수 없게 했어요. 아마 제 작업과 마주한 학생들은 당황했을 거예요. 어찌 됐든, 정보와 이미지를 쉽게 소비하지 말자는 게 핵심입니다.
작가님의 디자인은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여느 디자인과 달리, 작가님 작업에선 강문식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힌트를 찾기 어렵더군요. 2020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된 <ㅁ>과 ‘제14회 광주비엔날레’ 포스터 디자이너가 동일 인물이라고 누가 쉬이 상상할 수 있겠어요.
주변 사람들은 바로 알아채긴 하던데···.(웃음) 누군가 제 작업을 처음 접했을 때 “이게 한 사람이 디자인한 게 맞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는 저의 방향성과 일치합니다. 특정 시그너처를 삽입하거나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삶에 녹아든 디자인을 추구하거든요. 제가 애정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바니 버블스Barney Bubbles입니다. 그는 자신을 특정 이름이나 정체성에 묶는 것을 꺼렸는데요. 디자이너의 개인 브랜드가 아닌, 작업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철학이 참 인상적이에요.
그렇다면, 작가님이 지향하는 디자인을 ‘삶과 긴밀하게 이어진, 쓰임새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될까요?
고결하고 위대한 작품도 좋지만, 햇빛과 비를 맞아도 끄떡없는 간판 같은 디자인에 시선이 가요. 간판 제작자는 디자인업계에선 주목받지 못하지만, 도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영향력 있는 작업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일상에서 발견한 파편들과 의외성(변수), 시간의 흔적을 담은 디자인으로 사람들과 호흡하는 것이 저의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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