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조 로소 디젤의 창립자이자 이탈리아 거대 패션 기업인 OTB 그룹의 회장. 패션 제작 및 유통업체인 스태프 인터내셔널과 브레이브 키드, 그 외에 다수의 투자 회사도 소유하고 있다. 열렬한 미술 애호가이자 미술품 수집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현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베네토의 바사노 델 그라파에 거주한다.
프랑스에 LVMH 그룹이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OTB 그룹이 있다. 그룹의 주인은 올해 일흔에 가까운 렌조 로소다.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의 평범한 농가 출신으로, 스물세 살에 디젤을 창립해 세계적 성공을 이끈 사업가이자 근래에 흔치 않은 자수성가형 백만장자다. 그가 이끄는 OTB 그룹은 현재 디젤과 메종 마르지엘라, 마르니, 빅터앤롤프, 질 샌더, 아미리 등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주요 패션 브랜드들이 현재는 대부분 프랑스 럭셔리 기업의 소유인 것을 감안할 때, 독보적이고 이례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렌조 로소는 이 글로벌 패션 그룹을 이끄는 한편, 또 다른 회사인 스태프 인터내셔널을 통해 디자이너 브랜드 및 라이선스 브랜드와 협력한다. 개인 회사인 레드 서클Red Circle을 내세워 여러 신생 기업에 투자하며, 비영리단체인 OTB 파운데이션을 통해 세계 곳곳의 빈곤 문제와 재해 방지에도 힘을 보탠다.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 복원과 같은 자국의 주요 프로젝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의 스포츠 클럽인 바사노 비르투스 55 축구 구단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한 사업 규모와 과감한 확장 전략, 정글과 다름없는 패션업계를 수십 년 넘게 헤쳐온 사실로 볼 때 냉혹한 야심가 혹은 야생의 맹수가 연상되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문이 열리자 얼굴 전체에 호방한 미소를 띤 뽀글 머리의 남성이 들어섰다. 편안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개인 제트기를 타고 인터뷰 직전에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를 오가며 여러 사업을 경영하는 바쁜 삶이 엿보이네요. 서울은 얼마 만의 방문인가요?
2022년 디젤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에 이어, 이번엔 메종 마르지엘라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에 맞춰 약 2년 만에 서울을 찾았습니다. 요즘 딸들과 같이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데다 K-팝도 자주 듣는 터라 온 가족이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했어요. 한국은 지금 전 세계가 주목하는 트렌디한 나라입니다.
저 역시 인터뷰에 앞서 한남동 메종 마르지엘라 플래그십 스토어에 다녀왔어요. 간결하면서도 따스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더군요. 1층에 자리한 카페도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고요. 디젤에 이어 꾸준히 대규모 매장을 선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한남동에 몇 차례 방문한 적 있어요. 이색적인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하고 다양한 예술 공간도 공존하는 쿨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죠. 이런 자리에 우리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선보이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2021년에 ‘OTB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한국 법인을 설립한 이래, 그룹 내 여러 브랜드의 꾸준한 확장을 시도해왔습니다. 2022년과 2023년에 걸쳐 한국에만 약 20개 매장을 오픈했어요. 한국은 현재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높을 뿐만 아니라 패션은 물론 음악과 영화, 라이프스타일까지 전방위에서 최신 트렌드의 진원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투자할 생각입니다.
적극적인 투자 계획이 반갑게 들리네요. 실제로 디젤이나 메종 마르지엘라 등 여러 브랜드가 한국에서 꽤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OTB 그룹의 이러한 분위기와 달리, 최근 많은 하이패션 브랜드들이 침체 위기를 겪고 있어요. 소비자들은 더 세분화되고 까다로워졌으며, 몇몇 브랜드는 상업성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에 직면했죠.
일부 브랜드가 불안한 상황에 처한 것은 맞습니다. 기업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러나 OTB 그룹의 전략은 한결같이 ‘제품’입니다. 아름다운 제품을 최우선으로 두면 반드시 이를 이해하는 추종자들이 따를 것이라고 봅니다. 좋은 제품을 선택할 줄 아는 지적인 고객들과의 소통 그리고 이들과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우리의 핵심 포인트지요. 지속적인 소셜 활동을 통해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이들과 함께 발맞추며 그룹을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지금처럼 글로벌 패션 그룹을 이끌기 이전, 일찍이 성공한 패션 사업가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디젤의 초고속 성장과 더불어 당신의 성공 신화가 미디어를 도배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지나온 커리어도 듣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데님을 즐겨 입었습니다. 15세 때 어머니의 재봉틀을 빌려 첫 번째 옷을 만들었죠. 벨 라인 데님 바지였어요. 데님과 빈티지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1978년에는 디젤을 창립했습니다.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상호작용을 하고 싶었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1990년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디젤의 혁신적인 광고와 당시의 영향력을 기억할 텐데요. 디젤 같은 알짜배기 브랜드를 뒤로하고, 갑자기 하이패션으로 눈을 돌려 OTB 그룹을 창립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디젤을 운영하던 시절에도 늘 프레타포르테pre-a-porter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내부에 스타일랩Style Lab이라는 부서를 만들어 디젤과는 또 다른,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브랜드를 모색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죠. 그러다 1976년에 문을 연 ‘스태프 인터내셔널Staff International’이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비비안 웨스트우드나 마틴 마르지엘라 같은 세계적인 하이패션 디자이너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2000년부터는 아예 스태프 인터내셔널을 직접 인수하면서 럭셔리 브랜드의 생태계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어요.
그룹 확장의 발판이 된 건 역시 메종 마르지엘라의 영입이겠죠. 하우스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혹시켰나요?
창립자인 마틴 마르지엘라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했어요. 디젤을 운영할 때도 제대로 된 빈티지 데님을 만들겠다며 직접 일본에 가서 빈티지 제품을 구매해 해체하고 연구하는 일이 잦았죠. 그런데 마틴이 이끄는 메종 마르지엘라 역시 수작업의 가치를 중시하고 모든 것을 바닥부터 시작해 새롭게 창조하는 하우스였어요. 미래에 대한 비전 역시 비슷하다 보니 여러 면에서 소통하기가 수월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틴이 나를 찾아와 뜬금없이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어요. 당시 그는 모두가 함께 일하기를 선망하던 톱 디자이너였던 만큼,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된 코드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다면요?
패션의 존재 이유나 표현 방식에 대한 생각이 일치했고, 무엇보다 우리 둘 다 옷 자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빈티지에 푹 빠져 있는 점도 닮았고요. 내가 빈티지에서 영감을 받는 데 그친다면, 그는 영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능력까지 갖췄다고 할까요? 그리고 절대 자기 복제가 없다는 점! 당시 마틴이 만들었던 컬렉션은 동일한 디자인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습니다.
디젤과 메종 마르지엘라를 비롯해 마르니, 질 샌더, 빅터앤롤프 그리고 아미리까지. 개성 있는 패션 브랜드들로 포트폴리오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브랜드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생각하는 하이패션의 정의는?
하이패션은 예술과 창의성을 대변합니다. 세계 최고의 장인들이 최상의 소재로 만든 완벽한 품질의 제품을 소유하는 기회죠. 우리 그룹의 모든 브랜드는 이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멋진 브랜드들과 함께하면서, 우리 그룹이 점점 더 많은 인지도와 존경을 얻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전개하는 브랜드마다 독립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 브랜드에 어느 정도 관여하며, 회사의 역할과 범위는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요?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부분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선정입니다. 각 브랜드의 CEO들과 같이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전략적으로 논의하고, 우리가 원하는 크리에이티브한 비전을 실현해줄 적임자를 찾습니다. 그 밖에도 업계 리서치나 타 브랜드의 전략 파악, 기술적인 부분의 지원 등 보다 효율적인 결과 산출을 위한 추가적인 부분들에 관여하지요. 내부의 크리에이티브 팀은 물론 외부 크리에이티브 팀과도 늘 긴밀하게 소통하는 편입니다.
한남동에 새로 문을 연 메종 마르지엘라 플래그십 스토어.
OTB라는 회사명은 ‘Only The Brave’의 약자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를 담았나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도전하거나 남들과 다른 것을 실행하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어려움과 망설임에 대응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소비자들은 굉장히 세심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이들을 사로잡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앞서 생각하고 시장보다 앞서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늘 남들과 다른 길,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고자 했어요. 가끔은 이러한 신념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때도 있었지만 말이죠. 이를 위한 용기, 용기의 가치를 회사 이름에도 담고 싶었습니다. 실제 회사에서도 항상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고 팀워크를 통해 서로 간의 아이디어를 북돋을 수 있게 독려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용기를 내는 것과 주변 사람들의 열정을 이끌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텐데요. 직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끄는 당신만의 리더십이나 노하우가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더 자주 소통하는 것이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 혁신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끊임없이 파악하고 이를 직원들과 공유하며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겁니다. 직급상으로는 분명 다른 위치에 있더라도 절대 명령하거나 권위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집중해야 합니다. 각자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고 실현되는 것을 느껴야 직원들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됩니다.
플래그십 오픈에 맞춰 송승림 작가와 협업해 제작한 ‘5AC’ 백.
패션 외에도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다수의 기업에 투자하고 있고요. 최근에 관심을 쏟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다양한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복과 남성복, 유아복, 주얼리, 가구와 음식은 물론 자동차와 호텔, 와인과 올리브 오일까지. 최근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분야는 뷰티 산업입니다. 특히 의료 산업 기반의 뷰티 클리닉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마침 한국이 뷰티 산업에 특화된 나라인 만큼, 이번 여행 중에 이 분야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계획입니다. 오늘도 인터뷰가 끝나면 아내와 같이 피부과에 방문할 예정이에요.
모두 럭셔리 산업의 근간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한평생 이 산업에 몸담아오면서,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에서의 진정한 럭셔리는 무엇인가요?
3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요소는 외부적인 것이죠. 구체적으로는 옷이라 할 수 있고요. 옷차림이 마음에 들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경험, 누구나 있지 않나요?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알맞은 옷을 입으면 일상에서 훨씬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옷은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더하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지요. 두 번째는 내부적인 것, 심리적인 럭셔리입니다. 이건 음식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유기농 또는 좋은 품질의 음식을 먹으면 신체에 영향을 끼치며 건강과도 직결됩니다. 세 번째는 장기적인 것, 다시 말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내가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뷰티 클리닉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사람들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누며 오랫동안 건강하고 즐겁게 함께하는 삶. 그것이 바로 진정한 럭셔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COOPERATION 메종 마르지엘라(792-7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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