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12월호

반가운 얼굴

해외에서 반가운 전시 소식이 들린다. 그중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30대부터 60대까지 한 시대를 통과하거나 짊어질 이들이 낯선 공간에서 펼치는 익숙한 세계.

EDITOR 박이현

런던에 새긴 깊은 발자취

양혜규×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2025년 1월 5일까지 열리는 양혜규의 <윤년Leap Year>은 1995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학제적 작업을 면밀하게 훑는 전시다. 양혜규의 작품은 섬세한 종이 콜라주부터 금속 도금의 방대한 설치 작품까지 광범위한 매체와 영역에 걸쳐 있다. 서베이survey 전시라 이름 붙었지만, 전시는 연대기순 나열이 아닌, 스토리텔링에 따라 구성되어 빨래 건조대와 뜨개실, 한지와 전구 더미, 기하학적인 모듈이 한데 섞여 있는 기이한 공간 속을 걷게 된다.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해 사회적, 신화적, 영적인 것으로 도달하는 흐름을 갖고 있는 전시장의 입구에는 ‘창고 피스’가 서 있다. 크라운 맥주와 그린 소주 박스 등이 적첩된 물건 더미는 작가가 런던 레지던시에 입주했을 때 작품을 둘 곳이 없어 쌓아놓은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 포장되고 가려진 작품은 전시 기간 일주일에 하나씩 꺼내져 관람객을 만난다. 2006년 작가의 외할머니가 살던 인천의 폐허에서 연 <사동 30번지>는 기존의 전시 질서를 전복한 데뷔전으로 당시 미술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라졌던 시간과 공간이 ‘사동 30번지-런던 버전’으로 부활했다. 종이접기와 반짝이 전구, 낡은 가정용 집기들이 고스란히 재현되었고, 당시 인천에 도착해 외할머니 집을 찾는 미공개 영상이 추가되었다. 신작은 작곡가 윤이상과 연결된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절된 시절 독일로 망명해 만든 ‘이중 협주곡’에서 실마리를 얻은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는 디아스포라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소리 나는 조각’ 연작의 새로운 작품인 ‘농담濃淡진 소리 나는 물방울-수성 장막’은 청각과 함께 촉각도 자극한다. 청색과 은색 스테인리스스틸 방울을 금속 링으로 엮은 커튼을 젖히고 나가면 온몸이 소리로 감싸인다. “제 작품의 제목은 저조차 외우기 힘든 낯선 단어들의 조합일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전시 제목들은 비교적 간단하죠. 창작이 다시 풀지 못하는 복합적인 옷감을 짜내는 일이라면, 전시는 그 옷감을 입기 편한 옷으로 재단하는 일입니다. 이번 서베이전을 준비하면서 제 작업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얻으려고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렸는데, 이는 마치 ‘윤년’처럼 드물고도 완벽한 기회였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의미처럼 <윤년>은 보너스 같은 전시가 될 것이다.



‘소리 나는 의상 동차動車 – 우람 머리통’, 2018,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양혜규: 윤년> 전시 전경.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양혜규: 윤년> 전시 전경.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2024,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1971년 서울 출생. 베를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각을 넘어 다감각적이고 몰입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작가의 작업은 노동, 이주 등의 문제를 미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경험을 제공한다.




신병을 앓은 듯

이불×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하 메트)을 건축할 당시 건축가 리처드 모리스 헌트는 외벽 기둥 사이에 낸 벽감을 그리스·이집트·르네상스·근대 양식의 네 조각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좌대만 깔린 공간으로 100년이 넘게 관람객을 맞았다. 2019년이 되어서야 커미션 작업을 통해 파사드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왕게치 무투와 나이리 바그라미안 등 작가 4인의 작품이 외벽을 장식했다. 그 다섯 번째 주인공은 바로 이불.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다. 작년 11월 메트는 “40년에 걸쳐 작업을 이어온 이불 작가는 동시대 최고의 한국 현대미술가이며 컨템퍼러리 조각, 설치의 선구자로 유토피아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라는 선정의 변과 함께 새 작업 계획을 공표했다. 지난 9월 12일 공개된 총 4개의 작품은 조각의 혼합적인 형태를 빌려 인간의 복잡성과 완전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미술관 정문 양옆으로 선 흑백의 인간 형상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와 현대 조각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데, 메트에 2점 소장된 신체 일부가 절단된 형태의 사이보그 조각과 맥을 같이한다. 건물 양 끝의 두 조각은 동물의 형상.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프리즘 조각으로 음식물을 토해내는 대형견을 묘사했다. 과거에 키우던 진돗개가 속이 불편할 때마다 일부러 풀을 뜯어 먹고 속을 비워내던 모습에서 착안한 작품이라고. 이불 작가는 장소의 특성, 건축양식, 미술관의 정체성을 프로젝트에 빼놓지 않고 담기 위해 메트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맨해튼 5번가를 지나는 불특정 인물들이 새벽이든 대낮이든, 해가 나든 비가 내리든 스치듯 지나가며 눈에 익힐 광경을 떠올리며. 작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해석의 과정과 결과를 “예전부터 이런 건물 앞에는 수호자를 연상시키는 조각을 세워놓았죠. 여기에 여러 시대, 여러 층위의 해석을 덧씌워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 조각은 일종의 ‘가디언’입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작업을 하든 지난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지난 1년 동안 여러 번 앓아누워 마치 신병에 걸린 것 같았다는 토로를 할 만큼 숙련된 작가에게도 깊이 있는 프로젝트였음이 읽힌다. 2002년 뉴욕 뉴 뮤지엄에서 열린 개인전 이후 20여 년 만에 미국에서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인 는 2025년 5월 27일까지 열린다.



‘Long Tail Halo: CTCS #2’, 2024, Courtesy the artist,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Long Tail Halo: CTCS #1’, 2024, Courtesy the artist,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Long Tail Halo: The Secret Sharer III’, 2024, Courtesy the artist,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64년 영월 출생. 조각에서부터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설치, 비디오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아름다움, 욕망, 부패, 쇠퇴의 주제를 탐구한다.




아름다움의 공통점

이미래×런던 테이트 모던 터바인 홀

과거 화력발전소의 골격을 지닌 35m 높이, 약 3300㎡(998평)에 달하는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터바인 홀Turbine Hall이 불쾌한 형상과 액체로 점철되었다. 벌어진 상처의 조직까지 샅샅이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평소 밖으로 나올 일이 드문 붉은 속살이 황홀한 소우주처럼 보여 순간 고개를 젓게 만드는 당혹함마저 느껴진다. 30대 중반의 한국 작가가 테이트 모던에 처음 입성했다는 쾌보보다 핏빛 작품에서 발하는 기괴함이 더 먼저 다가온다. 기술 발전을 둘러싼 인간의 희망과 두려움을 탐구하는 이미래 작가는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Open Wound> 전시에 공포와 아름다움이라는 양가감정을 심어두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의 행동 뒤에 진정성, 희망, 연민, 사랑,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같은 부드럽고 취약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관심이 가요. 아름답다는 느낌과 가슴이 아프다는 느낌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둘 다 심장을 건드리는 감정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상처와 함께 사는 것, 그리고 그 상처의 아픔과 역경, 어려움을 잊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신체로 산업을 지탱한 노동자의 실제적인 노고와 상처는 더없이 좋은 무대에서 작품으로 녹아든다. 작가는 화력발전소에서 쓰던 크레인과 쇠사슬을 사용해 공사장에서 쓰이는 천을 공중에 매달았다. 광부들이 일을 마치고 세척 시설의 천장에 도르래를 걸어 작업복을 걸어둔 문화 일부를 빌려왔다. 그리고 터빈 엔진을 설치하고 호스를 연결해 붉은색 체리즙과 점액질을 혼합한 액체를 천 조각에 떨어트린다. 액체는 천에 들러붙어 뻣뻣해지고 부패한 살덩이 혹은 벗겨낸 피부 가죽처럼 변한다. 재가동된 터빈은 전시가 끝나는 2025년 3월 16일까지 100개의 조각을 150여 개로 늘린다. 증식하는 조각은 오래전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이들의 것인가? 불안정하고 쇠퇴하는 현시대에 육체적, 정서적 노동에 지친 이들의 것인가? 물음표를 떠올리게 한다.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 Tate (Larina Fernandes)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 Tate (Oliver Cowling with Lucy Green)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 Tate (Oliver Cowling)



1988년 서울 출생. 살아 있는 생물을 연상하며 동작하는 작가의 대규모 설치 작업은 선형성과 발전의 서사, 철저히 구별된 자아와 사회적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다.



WRITER  박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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