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10월호

공간의 재구성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아채기가 어렵다. 미술 작품과 만나 성격이 확 바뀐 공간들.

EDITOR 박이현


염지혜 작가의 ‘검은 태양’(2019)이 설치된 생 로랑 서울 플래그십.



관계의 확장

염지혜 × 생 로랑 서울 플래그십


위에서부터 염지혜의 ‘검은 태양Le Soleil Noir’(2019)과 ‘물구나무종 선언The Manifesto of Handstanderus’(2021)


프리즈 서울이 개최될 때마다 흑백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예술적 오라로 탈바꿈하는 공간이 있다. 바로 ‘생 로랑 서울 플래그십’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의 감성을 바탕으로, 2022년에는 숯으로 대표되는 이배 작가가 생 로랑을 위한 작품을 선보였고, 2023년에는 저스틴 웨일러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물을 매장에 설치한 것이 대표적 사례. 본디 무채색에 가까운 곳인지라, 지난 2년 동안 설치된 작품을 보노라면, 화이트 큐브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올해 생 로랑 서울 플래그십은 11월 23일까지 염지혜 작가의 영상 작품을 공개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생 로랑이 공식 후원하는 <피노 컬렉션: 컬렉션의 초상>(송은) 전시를 기념하는 자리로, 피노 컬렉션의 수석 큐레이터 카롤린 부르주아가 선정한 염지혜 작가의 ‘검은 태양’(2019)과 ‘물구나무종 선언’(2021)이 2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검은 태양’은 성역화된, 그리고 정치 논리에 휩싸인 과학이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경계하고, ‘물구나무종 선언’은 기후 위기와 팬데믹 등 재난에 직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관점의 전환(물구나무서기)을 제안하는데, 플래그십 내 대리석의 추상적 패턴이 작품과 이어지는 듯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인간과 자연의 연약한 관계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일단 가만히 지켜보는 중

엘름그린 & 드라그셋 × 아모레퍼시픽미술관


Elmgreen & Dragset, ‘The Amorepacific Pool’, 2024, Photo: Andrea Rosetti


Elmgreen & Dragset, ‘Shadow House’, 2024, Photo: Andrea Rosetti


분명 평소 자주 들르는 곳인데, 미술관인지 주거 단지인지 헷갈린다. 예전 모습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실제 크기를 방불케 하는 수영장이 전시 공간에 들어섰기 때문. 그뿐만 아니다. 유럽에서 볼 법한 약 45평 규모의 단독주택도, 레스토랑도 지어져 있다. 이 모든 건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엉뚱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관객이 미술관을 다르게 바라보기를 바랐어요.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기 전 사진부터 찍는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을 거예요. 처음엔 설치 작품이 SNS 피드처럼 불연속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이들이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정해진 이야기는 없어요.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구축하면 돼요.” 전시장을 걸으니, ‘감시’와 ‘연결’이 떠올랐다. 먼저, 안전 요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고(‘Watching’, 2024), 그의 망원경이 향한 수영장 ‘The Amorepacific Pool’(2024) 속 사람들은 오로지 손바닥에만 집중하고 있다. 한편, ‘The Cloud’(2024) 레스토랑에서 손님은 영상통화에 몰두하고 있으며, ‘Untitled[the kitchen]’(2024)이라는 주방 혹은 실험실에선 2명의 여성이 현미경으로 무언가를 살피는 중이다. 또 ‘Shadow House’(2024)에 사는 소년은 외로이 창밖을 쳐다보는데, 마당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어 주변 공기가 스산하다. 화룡점정은 2개의 세면대와 거울, 이를 연결하는 배수관으로 이뤄진 작품 ‘Separated’(2021). 아무리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더라도, 혹은 무심해 보일지라도 나는 당신을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다. 내년 2월 23일까지.




인생의 덧없음에 관하여

우르스 피셔 × 제이슨함


전시 전경. 사진: 제이슨함


Urs Fischer, ‘Duality’, 2019, Coursesy of the artist, Photo: Mats Nordman


제이슨함이 얼마 전 매입한 갤러리 바로 옆 건물을 우르스 피셔의 작품 세계로 물들였다. 성북동 언덕 꼭대기에 있는 이곳까지 걸어 올라오면서 그동안 인생에서 마주한 고난이 떠올랐는데,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작가가 곳곳에 심어둔 유머러스한 요소들이 “그래, 삶은 여행이지”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게 하더라. 12월 7일까지 계속되는 는 우르스 피셔의 대표 조각과 회화 작품을 한데 모은 전시다. 핵심은 전체 부지가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변신했다는 것. 이에 관해 작가는 “전통적인 화이트 큐브처럼 작품을 위한 여지를 만들려 역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해방된 공간이에요. 공간과 작품은 공생 관계에 있죠”라고 설명한다. 그가 구성한 는 흘러간 시간을 돌아보는 모양새다. 뿌연 유리창이 1970~1980년대 아날로그 영사기가 연상되는 예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 더불어 피에타를 닮은 ‘Invisible Mother’(2015) 분수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순환을 물의 흐름으로 표현한 듯하며, 창틀 위의 달걀(‘Untitled’, 2018)은 바닥에서 프라이(‘Chicken’, 2013)로, 프라이팬 위 돼지(‘Pigs & Porks’, 2024)는 베이컨(‘Eternity’, 2023)으로 환생했다. 심지어 변기 안은 과일로 가득한데(‘Untitled’, 2015), 문득 “먹고 싸고 맨날 하는 그거 말고, 하나쯤 기억에 남는 기똥찬 순간이 필요하다”라는 한 드라마 속 대사가 오버랩돼 다시금 지나간 삶을 반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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