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8월호

THE RALLYE DES PRINCESSES

리차드 밀이 후원하는 여성 대상의 빈티지 자동차 경주 ‘랠리 드 프린세스’. 
파리 방돔 광장에서 출발해 스페인 국경의 안도라공국까지, 매일 밤 색다른 파티와 함께 펼쳐지는 
격정적이고 낭만적인 1600km의 여정에 유일한 아시아 참가자이자 한국 대표로 함께했다.

EDITOR 윤정은


‘랠리 드 프린세스’는 빈티지 자동차를 타고 프랑스의 아름다운 고성과 유적지들을 거치며 승부를 겨루는 대회다.


2명씩 총 60팀.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120명의 여성이 함께 울고 웃었다. 때로는 짜릿했고, 때로는 좌절했으며, 누군가와 미묘한 감정 다툼을 하기도 했다. 얼싸안고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순간도 있었다. 5일간의 여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경쟁과 우정이었다. 처음 가본 먼 타지에서, 이렇게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애초에 사전 정보는 단순했다. 빈티지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며 순위를 가르는 경주. 지난 5월 말, 프랑스에서 열린 ‘랠리 드 프린세스’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정식 명칭은 ‘랠리 드 프린세스 리차드 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시계 브랜드 리차드 밀이 후원하는 행사로, 오직 여성만 참가할 수 있는 전통 있는 자동차 대회다. 매년 이맘때 파리 방돔 광장에서 출발해 프랑스 곳곳의 고성과 유적지를 거치며 치러진다. 올해로 23회를 맞은 ‘랠리 드 프린세스’는 기존 루트에 변화를 주어 프랑스 서부와 남부를 가로지르는 보다 긴 여정으로 꾸려졌다. 총 5일간, 파리에서 시작해 투르Tours, 생마르탱Saint-Martin, 카르카손Carcassonne 등을 거쳐 안도라공국Principality of Andorra까지 이르는 총 1600km의 코스다.



각 팀은 2인 1조로 이루어진다. 주어진 안내서에 따라 정확한 속도로 주행해야 하기 때문에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의

호흡이 중요하다.


60여 대의 빈티지 자동차가 방돔 광장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대회 전날엔 포토 타임과 리셉션 행사가 열렸다.


참가 팀은 2인 1조로 이뤄진다. 그저 빠르게만 달리는 것이 아니다. 까다로운 제한 조건이 걸린 레귤래러티 방식에 맞춰, 주어진 구간을 별도의 지도 및 안내서에 따라 운전해야 한다. 따라서 주행 내내 고도의 집중력과 정확도가 요구되며,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co-driver의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에어컨이나 내비게이션 등의 편의 장치가 없고, 조작과 속도 조절이 쉽지 않은 낡은 차라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1946년에서 1990년 사이에 생산된 빈티지 자동차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리차드 밀의 후원으로 참가한 우리 팀의 차량은 1980년대에 출고된 ‘오스틴 미니’. 세월의 흔적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보리 색상 차량의 앞쪽엔 참가 번호 69번을 가리키는 배지와 대한민국 국기가 붙어 있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그리고 이번 대회의 유일한 아시아 참가자라는 점에서 더욱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참가자들의 면모도 다양했다. 엄마와 딸, 할머니와 손녀, 직장 동료 등 다양한 조합이 모여 각자의 팀워크를 뽐냈다. 흥미롭게도 참가자의 상당수는 두 차례 이상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었는데, 그 자체로 대회의 매력을 증명하는 듯했다. 한 참가자는 “5년째 참여하고 있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딸과 함께 출전해 더욱 기대된다”라고 전했다. 팀끼리 옷을 맞춰 입는 문화도 흥미로웠다. 대회 전날의 리셉션부터 매일 밤 특별한 장소에서 열리는 파티까지, 주어진 드레스 코드에 맞춰 열정적인 트윈 룩 경쟁이 펼쳐졌다. 관찰하고 함께하는 즐거움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날에 함께 모인 리차드 밀 패밀리.


다양한 조건에서 정확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테스트한다.


참가 팀끼리 의상을 맞춰 입는 문화가 있다. 낮에는 활동성을 강조한 스포츠웨어, 밤에는 개성 있는 드레스로

다채로운 트윈 룩의 향연이 펼쳐졌다.


수백 대의 빈티지 자동차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를 줄지어 달리는 풍경을 상상해보시라. 매년 개최하는 유명 행사이기 때문인지, 지나는 길목마다 많은 사람이 구경 나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첫날의 행선지는 파리 서쪽의 투르 지역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루아르 샤토Loire Châteaux에서 점심을 먹고, 13세기에 지은 요새 형태의 농장 그랑주 드 메슬레La Grange de Meslay에 당도했다. 경주 방식에 대한 이해부터 생전 처음 보는 지도와 안내서, 시간 측정 장비의 사용법을 익히는 일이 은근히 난관이었다. 익숙지 않은 프랑스 고속도로 규정도 당황의 연속이었다. 둘째 날에는 프랑스 서쪽의 아름다운 섬 지역인 일 드 레Île de Ré에 다다랐다. 다행히 운전이 꽤 익숙해졌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럽 대서양 해안 내 최대 습지 중 하나인 마레 푸아테뱅Marais Poitevin도 둘러볼 수 있었다. 셋째 날에는 절벽과 강, 밤나무 숲이 어우러진 페리고르Périgord 지역을 배경으로 달렸다. 오찬 장소였던 샤토 드 빌레부아 라발레트Château de Villebois Lavalette에서는 푸아그라, 트러플 등 이 지역의 유명 식재료들을 맛볼 수 있었다. 넷째 날은 유명 관광지인 카르카손을 방문했다. 장엄한 성벽과 52개의 탑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유럽에서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로 꼽힌다. 중세를 테마로 한 저녁 행사에서는 이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공연을 향토 음식과 함께 즐겼다. 다섯째 날, 드디어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인 안도라공국에 도착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프랑스 대통령과 위르젤Urgell 교구의 주교가 공동 영주로서 통치하는 도시국가다. 제주도의 약 4분의 1 크기로 피레네산맥에 둘러싸여 있으며 카탈루냐어와 에스파냐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스키 코스가 유명해서 주변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휴가지라고 참가자들이 전했다. 마지막 날 밤에는 성대한 시상식이 열렸다. 이번 대회 1등을 차지한 스테파니 브랑디와 로르 드 카리에르 팀 외에도 ‘우정상’, ‘협동상’ 등의 명목으로 다양한 이들이 기쁨을 나눴다. 어머니와 함께 참가한 시각장애인 딸의 소감에는 많은 이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랠리 드 프린세스’는 약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터스포츠로 하나가 된 이들이 만들어가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휴식 시간을 위해 고성 앞의 공원에 정렬한 색색의 빈티지 자동차. 1946~1990년 사이에 생산한 자동차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중세 시대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카르카손 지역의 공연. 지역마다 특색 있는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모터스포츠는 일반적으로 남성 중심의 스포츠라는 인식이 높다. 하지만 리차드 밀은 이에 대한 여성들의 열정을 일찍이 이해하고 그 영역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그 일환으로 2014년부터 ‘랠리 드 프린세스’를 후원해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이 운전을 즐기고 자동차나 시계의 기계적 매력에 관심이 있다. 즐거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참여하게 되었다.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라고 리차드 밀의 브랜드 & 파트너십 디렉터 아만다 밀은 말한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떤 행사지?”하는 물음표로 시작했던 ‘랠리 드 프린세스’는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참여하고 싶다!”는 느낌표로 막을 내렸다. 진정한 럭셔리는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모험 정신과 매 순간을 즐기는 열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안도라공국에 마련된 파이널 존에 들어서는 모습.


포르쉐 ‘356 1600 카브리올레’와 함께 우승의 영광을 차지한 스테파니 브랑디 & 로르 드 카리에르.



함께 성장하는 힘

‘랠리 드 프린세스’에서 만난 그는 유쾌하고 매력적인 리더이자 든든한 동지였다. 창립자 리차드 밀의 장녀이자 브랜드의 브랜드 & 파트너십 디렉터인 아만다 밀Amanda Miile. 두 남동생과 함께 리차드 밀의 초고속 성장을 이끌고 있는 그가 리차드 밀 서울 부티크 오픈에 맞춰 서울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다. ‘랠리 드 프린세스’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런 행사를 기획하게 된 이유는?

창립자인 아버지가 모터스포츠의 열렬한 팬이다. 덕분에 리차드 밀도 창립 초기부터 모터스포츠와 꾸준한 인연을 맺어왔다. 다만 어느 날 돌아보니 남성 위주의 경기에만 치중한 것 같더라.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이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동차의 기계식 매력에 관심이 많은데, 이를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마침 1999년부터 랠리 드 프린세스를 주관해온 가문이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 우리가 참여하면서 경기 방식이나 프로그램 등을 좀 더 현대적으로 바꿨다.


올해는 서부에서 남부로 향하는 색다른 코스를 진행했다. 프로그램 구성에도 직접 참여하는지?

보통은 파리 방돔 광장에서 출발해 리비에라 해안까지 가는 일정이었는데, 올해는 최종 목적지가 안도라공국이었다. 프랑스에 아주 멋진 교외 도로가 많아 그런 곳들을 더 경험하고 싶다는 참가자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하지만 기존의 코스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어 내년에는 다시 서부로 갈지도 모르겠다. 리차드 밀 팀에서도 코스나 프로그램 구성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있다.


실제로 경주에 참여해 직접 주행하기도 한다. 참가자들 중에도 두 번 이상 꾸준히 참가하는 사람이 많더라.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대회의 가장 큰 매력은?

10~15년 전쯤 프랑스의 한 방송에서 한 집에 여러 사람을 가둬놓고 세상과 단절시킨 뒤 관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랠리 드 프린세스 행사는 이와 비슷하다. ‘오늘 저녁에 뭐 먹지?’, ‘이메일에 뭐라고 답하지?’ 이런 고민 없이, 매일 8시간씩 꼬박 운전하며 오직 눈앞에 주어진 상황에만 집중하게 된다. 말 그대로 일상을 떠나는 거다. 참가자 중에는 기업가도 있고 전업주부도 있는데, 각기 다른 형태로 바쁜 일상을 사는 이들이다 보니 남에게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기회가 흔치 않다. 랠리 드 프린세스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승자와 협력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서로 강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어떤 이는 이 행사에서 얻은 에너지로 1년의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프랑스 정부 차원에서 이 행사를 후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만큼 치유와 힐링의 시간이라는 의미다. 내게도 너무나 소중한 프로그램이다.



서울 청담동에 새롭게 오픈한 리차드 밀 서울 부티크. 한국의 전통 요소들을 가미해 이색적인 공간을 완성했다.


행사에 참가하면서 또 하나 인상 깊던 점은 리차드 밀 직원들의 결속력이다.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침 오늘 오전에 팀원들과 비슷한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우리가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 이뤄가는 일들에 대한 기쁨과 감사함을 공유했다. 각자가 해야 할 일들에 책임을 다하고 또 서로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회사가 지금처럼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워낙 많은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모두가 한 가족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랠리 드 프린세스 행사와도 비슷하지 않나? 함께 울고 웃고 같이 위기를 헤쳐 나가며 마법 같은 일들을 창조해가고 있다. 결국 모든 차이는 사람이 만든다.


랠리 드 프린세스 같은 여러 스포츠 이벤트를 비롯해 페라리, 에어버스와의 협업까지 파트너십의 범위가 넓다. 운동선수나 뮤지션, 배우 등 여러 ‘프렌즈’와도 함께하고 있다. 브랜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궁금하다.

맥라렌, 페라리, 에어버스 같은 브랜드와는 소재나 기술적 노하우를 많이 공유한다. 프렌즈들은 우리 시계를 직접 착용하면서 실질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이런 식으로 각기 새로운 생각들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더 많은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모든 관계들이 매번 유기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에 대해 어떠한 제약도 없다. 브랜드와 결이 맞고 함께 창조적인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언제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번에 서울 부티크를 새로 오픈했다. 한국적 모티프가 곳곳에 반영되어 있어서 놀랐다.

몇 년 전에 싱가포르 부티크를 구상하면서 ‘환대’의 개념을 떠올렸다. 고객들이 편안히 즐길 수 있는 동시에 우리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이번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우리 고객들은 전 세계로 자주 여행을 다니기 때문에, 매장이 비슷비슷하면 지루할 것 같다. 나와 직원들 역시 그렇지 않을까? 각 도시의 리차드 밀 매장에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도록 현지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베이지와 밝은 오크 우드 톤을 활용해 편안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옥의 서까래를 활용한 천장이 인상적이다.


가장 만족스러운 공간은? 이번 오픈을 계기로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지금 앉은 라운지를 비롯해 모든 공간이 마음에 든다. 우리가 추구하는 워치메이킹의 핵심 가치가 전부 담겨 있고 그것이 연속적으로 잘 표현된 것 같다. 앞으로 이곳이 브랜드를 더 넓게, 깊게 소개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길 바란다. 사실 얼마 전부터 프랑스 남부에 새로운 리차드 밀 하우스를 짓고 있다. 모두를 환대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 될 것이다.



COOPERATION  리차드 밀(512-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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