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8월호

HAUTE COUTURE

“프레타포르테가 노력의 산실이라면, 오트 쿠튀르는 나 그 자체다.” 디자이너 샤를 드 빌모랭은 오트 쿠튀르를 이렇게 표현한다. 
덧없이 빠르게 범람하는 트렌드의 홍수 속에서 오로지 패션을 위해 단단하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고유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디자이너와 장인은 수많은 시간을 고뇌하고 감내한다. 
실용성과 대중성보다는 예술성과 독창성에 초점을 맞춰 궁극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패션 판타지인 셈! 2024년 기준,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파리의상조합의 염격한 기준을 통과한 총 43개의 쿠튀리에만이 선보일 수 있다.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잔잔한 설렘으로 가득 찬 파리의 여름, 이들의 2024 F/W 컬렉션이 열렸다. 
환희와 감동으로 물든 그 현장에 럭셔리도 함께했다.

EDITOR 김송아




CHANEL


샤넬 공방 장인들의 손길 아래 탄생한 오트 쿠튀르와 오페라의 합연은 가히 성공적이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와의 이별 이후, 후임이 없는 상황에서 치러진 쇼는 샤넬 아틀리에가 묵묵히 지켜온 신념을 그대로 쏟아낸 듯했다. 파리 국립 오페라단, 파리 오페라 발레단 등 문화 예술계의 부흥을 위해 꾸준히 후원해온 샤넬이 하우스의 역사에서 요긴한 역할을 해온 ‘오페라 가르니에’를 테마와 쇼장으로 선정한 이유도 그 때문. 복도의 문을 열고 모델 비토리아 세레티가 등장하면서 로맨틱한 룩을 입은 모델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트위드, 깃털, 벨벳, 새틴 등 화려한 소재로 가득 채운 퍼프소매, 빅 케이프, 롱 드레스와 모델 모두가 착용하고 나온 다섯 갈래의 리본 헤어핀에서 샤넬의 기술과 노하우, 감성, 정체성이 오롯이 느껴졌다. 특히 피날레에 등장한 벌키한 화이트 드레스는 “샤넬의 웨딩드레스”라는 키워드로 SNS를 뜨겁게 달구며 쿠튀리에로서 샤넬의 위용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DIOR


여성을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패션으로 모든 여성 스포츠 선수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쇼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디올이 매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는 로댕 박물관 내부는 전설적인 비주얼 아티스트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가 제작한 선수들의 벽화로 채웠다. 아테네 여신 같은 드레이프 드레스, 저지 소재를 활용해 직접 제작한 골드 메시, 고대 스포츠가 생각나는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통해 스포츠와 패션은 완벽히 하나가 되었다.




THOM BROWNE


톰 브라운의 오트 쿠튀르는 모슬린muslin으로부터 시작한다. 모슬린은 촘촘한 직조감이 일품인 흰색 직물로 컬렉션의 근간이 되는 의류의 시작점이자 기본 바탕이다. 톰 브라운은 초심으로 되돌아가 샘플을 제작한 모슬린을 자르고, 조립하고, 레이어드해 유기적이고 볼륨감 넘치는 실루엣을 완성했다. 코튼 슈트를 입은 16명의 선수들이 줄다리기를 하며 컬렉션이 시작되었고,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모슬린을 켜켜이 쌓아 아메리칸 스포츠를 표현한 룩을 입은 모델들이 런웨이를 물들였다. 금, 은, 동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시퀸 재킷을 입은 3명의 모델, 금으로 만든 월계수 헤드피스를 장착한 모델이 시상대 위로 오르며 쇼가 끝났다. “오트 쿠튀르는 패션의 올림픽이다”라는 톰 브라운의 연출 의도가 단번에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VIKTOR&ROLF


또 어떤 기상천외한 룩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빅터앤롤프의 컬렉션이 발표되기 전 항상 떠오르는 궁금증이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디자이너 듀오 빅터 호스팅과 롤프 스뇌렌은 역시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98 F/W 시즌에 발표했던 ‘아토믹 봄브Atomic Bomb’ 컬렉션에서 힌트를 얻어 큐브, 삼각형, 구 같은 삼차원의 기하학적 실루엣을 접목한 피스를 대거 선보였다.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비판을 빅터앤롤프만의 유머로 승화시킨 것.




BALENCIAGA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그바살리아의 네 번째 발렌시아가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공개됐다. 데님과 컬러풀한 파카 소재의 패치워크, 플라스틱 쇼핑백을 녹여 만든 기둥 드레스, 벨트를 엮어 만든 드레스에서 의복이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격식과 편견을 깨부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다.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블랙 나일론 드레스로 컬렉션의 피날레에 완벽한 방점을 찍었다.




GIAMBATTISTA VALLI


쇼장의 조명이 꺼지고 이어서 등장한 두 인도 음악가의 연주와 함께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쇼가 시작했다. 디자이너는 이번 시즌 인도네시아 발리와 이탈리아 두 문화의 융합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얼굴과 어깨에 꽃잎을 살포시 더해 한 송이의 꽃다발처럼 변모한 모델을 필두로 베이피 핑크, 사프란 옐로, 블루, 바이올렛, 레드 컬러의 드레이핑 드레스가 줄을 이었다.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주특기이자 시그너처인 거대한 튈 드레스 또한 빠지지 않았다.




ARMANI PRIVÉ


90세를 목전에 둔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했다. 바로 자신의 나이와도 같은 90벌의 룩을 런웨이 위로 올린 것! 진주를 주 소재로 활용한 샴페인 골드, 실버, 블랙 컬러의 우아한 이브닝 룩은 눈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거대한 진주를 단 베레모, 단추 대신 진주를 단 재킷에서 그의 내공이 빛났음은 물론이다. 여전히 건재한 디자이너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SCHIAPARELLI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니얼 로즈베리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정점을 찍었던 1950년대로 우리를 데려갔다. ‘호텔 살로몽 드 로스차일드Hôtel Salomon de Rothschild’의 지하 살롱을 베뉴로 활용해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샹들리에 빛에 의지한 모델이 위엄 있고 경건하게 걸어 나왔다. 불사조의 날개를 조각한 실버 망토를 시작으로 뾰족뾰족한 텍스처의 가운, 하이힐을 디테일 요소로 사용한 드레스, 마지막으로 거대한 튈 스커트와 코르셋 뷔스티에까지. 모든 룩의 기원은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아카이브와 스케치를 참고한 것. 역사에 현대적인 재해석을 가미해 오트 쿠튀르의 정신을 완벽히 계승한 컬렉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JEAN PAUL GAULTIER


2020년 돌연 은퇴를 발표했던 패션계의 악동, 장 폴 고티에는 시즌마다 게스트 디자이너와 함께 개성 넘치는 컬렉션을 선보인다. 지난 시즌 시몬 로샤의 바통을 이어 받아 꾸레쥬의 아트 디렉터 니콜라 디 펠리체Nicolas di Felice가 이번 시즌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그는 장 폴 고티에의 상징적인 코르셋을 이번 컬렉션의 핵심 축으로 삼아 다채로운 하이브리드 의류로 런웨이를 가득 메웠다. 그중 하이퍼 스퀘어로 불리는 얼굴을 모두 가리는 네크라인이 눈에 띄었는데, 이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전 가면을 쓴 사람들의 익명성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ROBERT WUN


로버트 운은 ‘타임 투데이’라는 테마로 브랜드의 창립 10주년을 자축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옷 위로 옮기기 위해 계절의 변화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눈이 쌓인 듯한 케이프와 드레스로 포문을 연 컬렉션은 나비 디테일과 꽃을 장식한 컬러의 향연, 여름과 가을을 거쳐 마침내 죽음으로 도래한다. 이후 피부 아래에 자리한 근육과 혈관, 3D 프린트로 완성한 해골 피스, 광활한 우주를 담은 드레스로 끝난 15분의 쇼는 우리네의 인생을 압축한 듯했다.




CHARLES DE VILMORIN


패션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샤를 드 빌모랭은 2021년에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인 이후, 쿠튀리에로서 완벽히 자리 잡았다. 한 편의 잔혹 동화가 떠오르는 이번 컬렉션은 팀 버턴, 지킬 앤드 하이드, 애거사 크리스티 등 미스터리 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명사들의 모습에서 차용한 요소를 곳곳에 녹여냈다. 너비 1.3m의 모자, 거대한 사이즈의 깃털 드레스는 화려해 보이지만, 디자이너와 4명의 어시스턴트가 두 달 동안 치열하게 작업한 결과물.




ARDAZAEI


보수적이고 엄격한 오트 쿠튀르 세계에 오랜만에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난 바하레 아르다카니Bahareh Ardakani는 수학, 엔지니어, 보석을 전공한 뒤 패션 디자이너가 된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완벽한 대칭을 자랑하는 디자인, 층층이 쌓인 러플, 드레스를 감싼 섬세한 비즈 장식에서 그가 그동안 겪어온 경험의 세계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브랜드명 아르다자에이는 부모님의 성을 줄여 만들었다고.




ZUHAIR MURAD


레바논의 패션 디자이너 주하이르 무라드의 컬렉션은 오랜 시간 투쟁해온 용감한 여성들을 위한 헌정이다. 반짝이는 크리스털,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비즈, 강렬한 애니멀 패턴, 총알을 맞아 부숴진 거울 조각을 형상화한 디테일은 고통과 슬픔에 맞서 새로운 개척지를 일궈낸 여성을 형상화한 것. 블랙, 레드, 새먼, 핑크, 바이올렛의 폭넓고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로 쇼의 무드가 한층 더 드라마틱해졌다.




STÉPHANE ROLLAND


콘서트홀 ‘살 플레옐Salle Pleyel’의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걷히며 샹송과 함께 한 편의 연극 같은 쇼가 시작됐다. 디자이너 스테판 롤랑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와 사진가 브라사이Brassaï의 작품으로부터 이번 컬렉션이 출발했다고 밝혔다. 관능미 넘치는 테일러링, 블랙과 화이트 컬러, 튈이 뒤섞인 쇼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ALEXIS MABILLE


‘샴페인’이라는 테마를 위해 쇼장을 찾은 모든 관객들에게 통 크게 ‘뽀므리’ 샴페인을 제공하는 위트로 환호를 받은 알렉시스 마빌의 쇼는 리도 극장에서 진행됐다. 웨이터가 따라주는 샴페인을 들이켜자마자 부드러운 크레이프, 육감적인 벨벳과 저지, 구조적인 새틴으로 제작한 파티 드레스의 행렬이 쇼장을 가득 메웠다. 샴페인 거품처럼 톡톡 튀는 매력을 지닌 미국의 댄서 디타 본 티즈Dita von Teese의 샴페인 쇼로 대미까지 완벽하게 장식했음은 물론이다.




IRIS VAN HERPEN


이리스 판헤르펀은 프랑스어로 ‘살아 있는 그림’을 뜻하는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의 개념을 적용한 ‘하이브리드’ 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공간에 임파스토impasto로 덮은 캔버스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모델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연출한 것. 3D 프린팅과 오간자, 실크 등의 소재를 결합한 드레스를 입은 채 움직이는 모델의 모습은 마치 초현실주의 작품 같았다. “예술 작품과 함께 룩을 자세히 살펴보며 장인 정신의 의미를 되새겨보길 바란다.” 판헤르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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