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조 서울에서 태어나 9개월 때 부모와 함께 캐나다로 이민했다. 몬트리올 맥길대에서 심리학으로 학사 학위를, 예일대에서 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지난 30여 년간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며 뉴욕은 물론 미국 전역의 공연계에서 활약 중이다.
20세기 미국 문학의 정수로 불리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 이제 이 작품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듯하다. 한국인 프로듀서가 이름을 올린 뮤지컬 작품 중 처음으로 전 세계 공연 관계자들의 꿈의 무대인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것. 현지에서의 호평도 이어졌다. 개막 첫 주부터 주간 판매 100만 달러 클럽에 합류했고, 이후 130억 달러의 판매량을 갱신하며 좌석 점유율 98%를 기록했다. 기쁜 소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 6월 16일 열린 제77회 토니 어워즈에서 최고 의상 디자인상도 거머쥔 것. 영광의 주인공은 바로 브로드웨이 베테랑 의상 디자이너 린다 조.“상을 받은 건 더 많은 일을 하란 의미”라며 지치지 않는 열정을 내뿜는 그녀와 맨해튼의 뮤지컬 홍보 사무실에 마주 앉아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먼저 토니 어워즈 수상을 축하합니다. 시상식 이후 약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시상식이 끝나고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갔어요.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주 주말에 다른 엄마들 그리고 5명의 아이들과 함께 페리를 타고 뉴욕 로커웨이 비치에 다녀왔어요. 엄마로서 좋은 점은 언제나 모든 일에 겸손해진다는 거예요. 일상은 부지런히 흘러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샴페인에 취해 있을 순 없으니까요.
수상을 예상했나요?
전혀요. 같이 노미네이션된 디자이너들의 색깔이 각양각색으로 완벽해서 누가 수상한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게다가 한 웹사이트에 올라온 예상 수상자 리스트를 봤는데, 제 이름은 언급조차 안 되어 있더라고요.(웃음) 시상식 날엔 그저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참석했어요. 아들과 함께 드레스와 턱시도를 맞춰 입은 뒤 레드카펫에서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했죠. 운좋게 수상으로 이어진 덕분에 아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었어요.
2014년에도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으로 의상상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아나스타샤>로 의상상 후보에 오른 바 있죠. 두 번이나 수상할 수 있던 저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노미네이트된 세 작품 모두가 시대극이었어요. 1920년대 재즈 시대를 그린 <위대한 개츠비>,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이 배경인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 그리고 20세기 초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아나스타샤>까지. 현대 의상이 아니다 보니 관객들 눈에 좀 더 신선하면서도 화려하고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던 점, 또 고증을 넘어선 저만의 재해석을 덧붙인 점을 높이 평가받은 것 같아요.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원작 자체의 무게가 크고, 동명 영화 등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인데요. 어떤 식으로 차별화를 두려고 했나요?
저희만의 방식으로 그 시대의 분위기와 현대의 균형을 맞춰 잘 드러내고자 했어요. 1920년대의 실제 패션은 허리선이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곡선보다는 직선을 강조하는 슬림한 실루엣이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어요. 하지만 현대의 눈으로 봤을 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서 허리선을 올려 곡선을 강조하고, 배우들이 안무를 편안히 소화하면서도 움직임을 최대한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또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그들이 속해 있는 세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려고 했어요. 개츠비로 대표되는 ‘뉴 머니’는 최대한 반짝이고 화려한 스타일로 꾸미고, ‘올드 머니’의 세계에 있는 데이지는 그와 반대로 파스텔 톤에 흐르는 듯한 실루엣의 드레스, 진주와 다이아몬드 등으로 절제된 부를 보여주었죠.
이번 공연을 위해 275벌 이상의 의상을 디자인했죠. 그중 여주인공인 데이지를 위한 드레스만도 10벌이라고 들었어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했던 <삼손과 데릴라> 때는 350여 벌을 디자인했어요. 그동안 200개가 넘는 작품을 하다 보니 남들에 비해 손이 꽤 빠른 편이에요. 특히 남성복 스케치의 경우 그동안 쌓아온 레퍼런스가 있어서 크게 어렵지 않아요.
이번 뮤지컬의 제작자,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신 대표가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고요.
몇 년 전 신 대표를 소개받았어요. 겸손하면서 또 협조적인 한국인 프로듀서와 일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인상적인 건, 그가 모든 스태프에게 원하는 바는 ‘가장 아름다운 쇼’를 만들자는 것 하나였다는 거예요. 보통은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을지, 어떤 부분을 축소시킬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신 대표는 이례적이었죠. 그런 부분이 모두의 창의성과 헌신을 끌어올려 쇼의 성공을 이끈 것이겠죠.
작품 의뢰가 들어오고 난 후 무대에 의상을 올리기까지, 기본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시나요?
스크립트를 읽고 난 후 열린 마음으로 연출을 만납니다. 연출자가 어떤 의도와 비전을 갖고 있는지 들어보기 위해서요. 연출이 원하는 콘셉트를 명확히 파악하고 나면 종이와 연필로 실루엣을 그리는 흑백 스케치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출의 코멘트를 받아 컬러 스케치를 해요. 이후에 원단을 선택하고 그 사이에 모슬린 천을 이용해 전체 디자인을 가봉한 뒤 첫 피팅 후 수정을 하죠. 실제 쓰일 원단으로 두 번째 피팅을 하고 나면 무대에서 배우들과 함께 드레스 리허설을 하는데 ‘춤출 때 이 부분이 불편해 보이더라, 노란색 드레스가 두 벌이나 있는데 하나는 다른 컬러로 바꿔야겠다’ 등 수정할 부분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수정에 수정을 거치고 나서 두 번의 프리뷰 이후 오프닝 당일을 지나야 드디어 발 뻗고 잘 수 있는 거죠.(웃음) 물론 그 후에도 중간중간 손을 봐야 할 부분들은 항상 생기지만요.
생각보다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한 과정이네요. 늘 강조하시는 ‘팀워크’도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쇼 비지니스에선 어떤 팀을 꾸리느냐 하나만으로도 성패가 좌우된다고 봐요. 제가 스케치를 끝내면 브로드웨이 곳곳의 신발 장인, 모자 장인들이 각 아이템을 멋지게 탄생시켜줘요. 뉴 머니 룩이나 쇼걸 드레스같이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코스튬은 뮤지컬 <라이온킹>이나 서커스 의상 제작을 주로 하는 팀이 맡아줘요. 이런 팀이 없다면 제가 아무리 빨리 스케치를 한다고 한들 무용지물이겠죠. 신춘수 대표가 우리의 전문성을 믿고 맡겨준 것처럼, 각자가 잘하는 분야를 최대한 서포트하고 열린 마음으로 더 나은 의견을 수용하는 태도가 중요해요. 제가 보기에도 제 작품들은 종이 위의 스케치일 때보다 팀원의 손을 거친 후 무대 위에 있을 때 훨씬 나은 것 같거든요.(웃음)
1994년부터 현재까지 쉬지 않고 활동해왔는데, 지치지 않고 꾸준히 일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30여 년을 왕성하게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의상 디자이너라고만 한정 지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전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이고, 한때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디자이너라는 정체성만큼 엄마라는 역할도 중요하게 여겨요. 쉬는 날엔 보통 아들들의 운동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러 가고,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다른 엄마들과 산책을 가곤 하죠. 공연계에 관심 있는 아이들에겐 인턴십 기회를 주기도 하고요. 일과 삶의 밸런스를 유지한 덕분에 여러 힘든 상황에도 부러지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왕성하게 일할 수 있었죠.
창의성은 주로 어떻게 충전하나요?
저는 관찰자예요. 의상과 관련된 전시는 물론 회화전도 자주 보러 다니고,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유심히 보기도 하죠. 여행을 가면 꼭 그 도시의 식료품점에 들러 사람들이 무슨 제품을 사가는지 관찰하기도 해요. 제 휴대폰엔 그런 순간들이 빼곡해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엔 항상 영감을 줄 만한 요소들이 숨어 있죠. 차곡차곡 쌓인 이런 순간들은 하나의 점으로 연결돼 디자인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 중 “넌 여자고, 소수자라 아트 분야에선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던 어머니 얘기를 하셨죠.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굳이 그 일화를 꺼낸 이유는 마이너리티인 어린이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었어요. 어머니는 서울에서 촉망받는 젊은 화가셨고, 석사 공부를 위해 캐나다로 온 이민 1세대였어요. 다양한 활동을 하셨지만 결국 아티스트로서 큰 성공은 하지 못하셨죠. 그 쓰라린 경험 때문에 전형적인 ‘아시안 타이거 맘’이 되어 저는 의사를, 언니는 변호사를 하라고 정해주실 정도였어요. 당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걸 성취하길 바란 것이었죠.
그런데 결국 의상 디자이너가 됐네요. 반대는 없었나요?
심리학 학사를 공부하며 의대 진학 준비를 했던 적이 있어요. 어머니의 뜻을 따른 거였죠. 이과 과목들을 주로 듣던 중 아트 클래스를 들었는데 관심이 생기더군요. 마침 공원에서 열리는 공연이 있기에 그해 방학부터 여름마다 그곳에서 즐겁게 일을 했어요.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졸업 즈음 먼저 공연 분야에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예일대 드라마 스쿨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고, 이후 지금의 커리어에 안착하게 됐습니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왜 그랬는지 이해도 되고, 또 그 방법이 결국 맞단 생각이 들더군요. 저희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쳐요. 최선을 다해 학업에 매진하면 나중에 어떤 진로를 선택하든 힘들게 공부한 그 지식들이 결국 다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요. 진로 선택에 더 다양한 문이 열리기도 하고요.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제가 데뷔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하늘에서 뿌듯해하실 거라 믿어요.
지난 30여 년간 뮤지컬업계에서 아시안이자 여자로서 일하면서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고립된 상황에 자주 놓였어요. 혼자 여자, 혼자 아시안 그리고 혼자 이성애자였던 적이 많았죠. 내 편은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계속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소수자일수록 목소리를 내야 사람들과 연결되고 결국 더 나은 작품, 혹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요즘은 마이너리티라는 점이 그 어느 때보다 장점인 시대예요. BLM(Black Lives Matter) 운동 이후 사회 전반은 물론 뮤지컬계도 소수자들의 권익에 굉장히 민감해지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목말라하죠. 저도 가능하면 아시안과 관련된 쇼에 많이 참여하려고 합니다.
‘뉴욕 브로드웨이’는 전 세계 뮤지컬인들에겐 꿈의 무대인 만큼 경쟁도 치열할 것 같습니다. 실제론 어떤가요?
젊은이들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고 싶어요. 어떤 작은 관계도 망치지 말라고. 브로드웨이는 사실 굉장히 작은 커뮤니티예요. 특히 의상 디자인이란 특정 분야라면 더더욱요. 결국엔 같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다시 마주칠 거예요. 저도 오래전에 일했던 사람들과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서 일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한국식으로 일단 머리 숙이고 열심히 일하세요.(웃음) 부와 명예부터 좇지 말고 자기가 맡은 일을 먼저 즐겁게, 열심히, 잘하세요. 그게 제가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기도 하고요.
내년 말 한국에서도 <위대한 개츠비>가 무대에 오를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한국 관객들에게 관람 팁을 준다면요?
전체적인 컬러의 조합과 각 컬러가 주는 힌트 등을 눈여겨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가령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파티가 열릴 때는 가을 톤이 대부분이지만 이와 반대로 퍼포머는 페리윙클 블루 컬러의 드레스를 입고, 데이지는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컬러를 입고 등장하죠. 저도 그때쯤 가족들과 함께 방문할 예정인데 오랜만의 한국 방문이라 벌써부터 설레네요!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