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엘 쇼키 중동 지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영상 작업을 중심으로 드로잉, 설치, 페인팅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실제와 허구가 혼재하는 서사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기존의 역사적 서술을 재해석하는 그의 작품 세계는 예술적, 종교적, 초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을 함축한다.
와엘 쇼키는 지난 4월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뜨겁게 달군 작가다. 여러 언론에서 그가 참여한 이집트관을 ‘꼭 봐야 하는 국가관 전시’로 선정하면서 아침부터 오픈 런 행렬이 이어진 것. 전쟁의 무익함을 비판하는 와엘 쇼키의 작품 ‘Drama 1882’는 오늘날 우리 상황과 맞물려 관람객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런 그가 9월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전시 준비차 한국을 찾은 작가에게 작업 관련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오는 9월 대구미술관 개인전을 앞두고 잠시 한국에 방문했다.
대구미술관 공간을 어떻게 조성할지 논의하려고 왔다. 또 머무는 동안 드로잉과 새로운 영상 작업을 제작할 예정이다. 영상 작업은 한국 구전설화와 전래동화에 내재한 다층적 레이어를 살펴본 다음, 오늘날 우리네 삶과 연결해보고자 한다.
커미션 작업 이야기인가? 판소리 형식이라고 전해 들었다.
맞다. 아직 대본을 완성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자세한 설명은 지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누군가 당신이 계속 질문할 거라고 미리 귀띔해주더라.(웃음) 지금 단계에선 “한국어로 번역한 스크립트를 판소리로 구성한 독특한 형식이 될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러브 스토리’에 가까운 동화라는 것도.
얼마 전, 팔라초 그리마니 미술관에서 전시한 ‘나는 새로운 신전의 찬가I am Hymns of the New Temples’(2023)도 작품 리스트에 있다.
이탈리아 문화부가 주최하는 ‘폼페이의 헌신, 고고학적 문제’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재해석하는 일은 처음이어서 프로젝트를 제안받았을 때 이것이 역사적 순간임을 직감했다. 리서치를 하면 할수록 그리스·로마와 이집트의 연결 고리를 찾는 일에 매료됐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해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를 배경으로 그리스·로마신화와 이집트 종교가 중첩되는 부분에 집중했다. 일례로, 지혜와 출산의 여신 이시스Isis는 사실 이집트에서 처음 숭배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그리스가 이집트를 점령한 뒤 이시스를 떠받들었고, 로마가 통치하고 나서는 이집트와 관련된 것들이 희미해졌다. (그리스의 신 제우스는 이오를 사랑했는데, 헤라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간 이오가 이시스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시스는 오래전부터 이집트에 존재했다.) 작업은 종교적 색채가 짙은 신화가 번역되고 해석되는 과정에 물음표를 던지는 데 방점을 찍는다.
소설가 모하메드 무스타갑의 작품에 영향받은 작품 ‘Al Araba Al Madfuna’(2012~2016)도 만나볼 수 있다.
<다이루트의 우화들Tales from Dayrut> 속 단편소설(이집트 사회의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조명하고, 초현실적 요소를 활용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것이 특징. 그중 쇼키는 ‘The JB-R’s’, ‘The Offering’과 ‘Horseman Adore Perfumes’, ‘The Sunflower’에서 영감을 얻었다)과 이집트 남부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 마을에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엮어 3부작으로 만들었다. 콧수염과 터번 분장을 한 아역 배우가 영상 속에서 성인의 목소리로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이는 내가 마을에서 영적으로 빙의된 소녀를 만난 경험이 모티프가 됐다. 대구미술관 전시에는 러브 스토리에 가까운 두 번째 파트를 출품할 것 같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집트관에서 상영한 ‘Drama 1882’를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고 어떤 마음이었나?
고대 아랍어로 이집트 역사를 풀어낸 영상 작품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보면서 예술이 서로 다른 언어, 역사, 음악을 통합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신했다. 추측건대 45분이라는 러닝 타임 동안 관람객이 자신의 역사가 떠오르는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가 생각난다는 실제 한국인의 의견도 있었다.
왜 ‘우라비 혁명Urabi Revolt’(1879~1882)에 주목했나?
우라비 혁명은 아흐메드 우라비Ahmed Urabi 대령이 이집트를 통치하던 테우피크 파샤Tewfik Pasha를 퇴위시키고,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일으켰다. 기실 1882년은 국제적으로 매우 중대한 시기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이주했고, 영국이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오늘날 이집트처럼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단지 바람일 뿐, 우라비 혁명도 결국엔 실패한 꿈 아닌가.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재해석된다”고 한다. 작가 역시 고고학자, 역사학자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해결책 대신, 타임라인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됐는지를 탐구하겠다는 의미다. 2011년 이집트 무라바크 정권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 이를 실패한 혁명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라비 혁명같이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무언가 시도를 하는 동안 미약하게나마 변화는 일어난다. 예술의 근원은 인류가 정의를 추구하는 데서 온다고 믿는다.
작품을 보노라면, 비판적인 접근보다는 예전으로 돌아가서 ‘이런 장면도 있었다’라는 시간의 파편을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Drama 1882’에서 몰타인과 당나귀를 모는 이집트인의 다툼에 주목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을까? 흡사 전쟁이란 작은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종국엔 절대 선과 절대 악을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피력하는 모양새다.
동의한다. 작업의 모티프가 된 사건은 공식 기록물이 없다. 누군가 과장해서 만든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다양하게 리서치를 하는데, 역사학자가 포함된 나의 팀이 큰 도움을 준다. 역사적·정치적 주제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일지라도 출처는 명확해야 한다. 이슬람에 전쟁을 선포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에서 출발한 작품 ‘카바레 십자군Cabaret Crusades’(2010~2015)을 소환해본다. 20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의 도화선이 된 연설을 기록한 인물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믿어지는가. 온라인에서 검색하면, 적어도 4가지 버전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교황의 발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역사다. 이러한 역사를 읽기 쉬운 형식으로 번역하는 게 나의 일이고.
스톱모션이 떠오르는 느린 편집이 눈에 띈다. 마치 ‘밀당’하는 것 같은 인물의 몸짓도.
‘Drama 1882’ 출연자들의 행동은 철저히 계산됐다. 느릿한 동작이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해서다. 당신이 언급한 장면은 두 번째 신Scene인 ‘European Quarter’에서 두드러진다.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이집트인과 뒷걸음치는 듯한 외국인의 모습은 현지인이 외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은유한다.
마리오네트와 인형, 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존 작품들과 달리, ‘Drama 1882’에선 성인이 등장한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 과거 당신이 말했던 “드라마를 지운다”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내가 악역을 맡는다고 인지하는 순간, 배역에 가치 판단을 하는 건 당연지사다. 유사하게, 배우의 연기력에 집중하다 보면, 영화 이면에 숨겨진 맥락을 놓치는 일이 왕왕 있지 않은가. 드라마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얼굴에서 표정을 배제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연기자actor가 아닌, 퍼포머performer라 부른다. 연기를 선호하지 않기에 구체적인 스토리도 전달하지 않는다. 그동안 마리오네트와 인형, 아이들을 등장시킨 것도 같은 이치다. 성인 퍼포머에게도 드라마적 요소와 거리를 두기를 바랐다.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퍼포먼스 덕분에 편향되지 않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관객들 또한 ‘선과 악’이라는 선입견 없이 작품을 봐줬으면 한다.
그런데 작품 제목에 드라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웃음)
‘드라마’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를 함의한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서사를 표현하는 일도 드라마의 범주 안에 있다. ‘Drama 1882’가 역사를 그려내는 또 다른 형식이란 뜻이다.
역사·정치·종교 등을 다루는 당신의 작업은 오늘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역사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시각적 표현 방식을 연구하고 또 선보이는 것. 역사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는 건 나의 역할이 아니다. 예로, ‘카바레 십자군’ 세 번째 파트는 기독교,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 분열에 초점을 맞춘다. 더불어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추적한다. 혹자는 내가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과 시각적 표현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넘어 해석의 가능성 차원에서 인식돼야 한다. 매일 똑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다 보면, 내성이 생겨 사안을 간과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2019년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서 언급한, 역사를 무대 위에 세워 엔터테인먼트처럼 제시한다는 뜻과 정치적 주제를 논하는 예술가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카바레’라는 단어가 인상적이었다. 앞으로도 카바레적 활동을 이어갈 것인가?
아랍 문화에서 ‘카바레’는 ‘오락성’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도덕과 윤리에 반하는 문화’를 상징한다. 엔터테인먼트 형태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나에게 중요하다. 소설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미리 펼치는 일과 같이 호기심을 자극해야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카바레 십자군’에서 십자군 전쟁이 시사하는 바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것처럼. 그래야 사람들이 어쩌면 지난할 수 있는 역사에 흥미롭게 다가가고, 나아가 사건의 내막을 찾아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쿠웨이트 등 걸프 국가의 이야기를 각색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다.
COOPERATION 바라캇 컨템포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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