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턴 일렉트릭의 1920년대 스트레이트 혼 스피커가 설치된 6 전시실.
세계 유일의 오디오 박물관
‘취미의 끝은 오디오’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컬렉션 중에 ‘오디오’ 분야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일단 그 매력에 빠지면 그만큼 헤어 나오기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음향’에 대한 탐닉으로 시작하는 이 취미는 기계공학의 내밀한 탐구를 바탕으로 온갖 장르의 음악과 함께 향유되며, 컬렉션이라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 그 역사를 ‘아카이빙’하는 것으로 완성도를 더해간다.
6월초, 서초구 헌릉로에 문을 연 오디오 뮤지엄 ‘오디움Audeum’은 바로 한 개인의 이러한 탐구와 컬렉션의 여정이 한데 집약된 장소다. “열다섯 살 때쯤, 집에서 사용하던 일본산 스피커가 미제 매킨토시 앰프로 바뀌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음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오디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음향 시스템을 알게 되어 수집을 시작했고, 작고한 최봉식 선생님과 함께 40년에 걸쳐 이 컬렉션을 완성했다.” 설립자인 KCC 정몽진 회장의 설명이다. 설립의 목표는 19세기 에디슨의 축음기에서 시작해, 알니코 자석을 사용해 만든 1960년대 중반의 가정용 하이파이 오디오까지 150여 년간의 오디오와 스피커의 발전사를 보여주는 것. 더불어 이 역사적 음향 기기들이 지닌 원래의 성능을 제대로 소리로 재현하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몽진 회장의 비전은 19세기의 축음기와 뮤직 박스,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 등 수백 점의 컬렉션을 집대성하고 그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오디오 박물관’으로 완성되었다.
‘소리를 경험하는 공간’인 만큼 ‘건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오디움의 컬렉션이 궁금해서 오시는 분들이 대다수지만, 건축물을 직접 보고 싶어서 방문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 오디움의 설계는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구마 겐고隈研吾가 맡았으며, 오디움은 그가 한국에서 선보인 최초의 뮤지엄 작품으로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도쿄 아오야마의 명소 ‘네즈 미술관’, ‘도쿄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스코틀랜드 던디의 ‘V&A 던디’, 최근 덴마크에 지은 ‘H.C 안데르센 뮤지엄’ 등이 그의 대표작. 자연의 소재를 사용해 인간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유연한 건축물을 선보이는 것이 구마 겐고 건축의 특징이다.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의 작품인 ‘오디움’. 외관에는 알루미늄 파이프로 빛을 형상화했다.
설계의 콘셉트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구마 겐고는 이렇듯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겼다. “질감과 빛, 바람과 향기를 모두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하고자 했다. 시각적인 면에 치중하는 기존 뮤지엄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태다. 관람객은 시각적인 요소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며, 이곳에서는 청각이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디테일은 오디움 건축의 첫인상을 만들어내는 내외부의 알루미늄 파이프다. 건물의 상부에서 수직하강하는 형태로 부착한 수천 개의 알루미늄 파이프는 마치 소나기처럼, 혹은 대나무창살처럼 공간에 유연한 리듬과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숲과 같은 건축물을 고민하다가 알루미늄 파이프를 사용해 숲속에서 비치는 햇살을 고안했다. 알루미늄 파이프의 두께나 배치를 랜덤으로 적용해 자연의 무작위성에 도달하고 싶었다.” 음향 감상에 최적화된 적당히 어두운 조도, 흡음을 위해 공간을 촘촘히 감싼 우드 패널, 전시실 밖을 나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는 빛까지, 구마 겐고가 추구하는 미학적 요소 역시 오디움을 완성하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좋은 소리’를 발견하는 여정
‘빈티지 오디오가 가진 소리를 제대로 구현해낸다’는 것이 목적인 만큼 오디움은 소수의 인원이 컬렉션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전시 방식을 택했다. 말하자면, ‘보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에 방점을 찍는 전시 형태다. 사전 예약으로 주 3일만 투어가 진행되며 하루 다섯 차례, 전문 도슨트와 함께 모든 전시실을 차례로 둘러보며, 음향기기의 흥미로운 발전사, 그 소리의 질감 속으로 한 발짝 들어설 수 있다. 개관과 함께 선보이는 첫 전시의 제목은 <정음(正音): 소리의 여정>이다. 오디움의 영구 소장 컬렉션을 둘러보며, 원음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좋은 소리’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초기의 스피커는 현재의 스피커와 구동 로직과 형태가 달라서 많은 분이 ‘소리가 과연 좋을까’ 의문을 가지는데 직접 들어봐야 합니다. 소리라는 것은 워낙 주관적이어서 ‘하이파이Hi-Fi’, 즉 ‘오리지널 소스에 충실한 소리 재생’이라는 키워드를 정했습니다. 이곳에서 ‘하이파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경험해보시길 권합니다. 청음을 통해 이를 최대한 경험할 수 있도록 각 스피커에 맞는 음악을 선정했습니다.” 오디움 측의 설명이다.
170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의 뮤직박스를 전시하고 있는 엑시트 갤러리.
(위부터) 1950~1960년대 가정용 하이파이 시스템을 전시하는 1전시실.
사진가 후카오 다이키의 국내 최초 개인전 <수집과 기록> 전시 모습.
전시 투어는 전시실의 가장 상부 층인 3층에서 시작해, 라운지가 있는 지하 2층에서 마무리된다. 150년에 이르는 오디오의 발전사를 1960년대부터 19세기의 에디슨 축음기까지 거꾸로 추적해가는 것. 우선 3층의 1전시실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 꽃핀 ‘가정용 하이파이’ 제품들을 소개한다. 현재까지 전통이 이어지는 마란츠와 매킨토시, JBL의 앰프와 스피커를 만나볼 수 있으며, 오디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스피커로 손꼽히는 제임스 B. 랜싱의 ‘Lansing Iconic’(1937)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1930~1940년대 세계 영화 음향 시스템을 양분했던 미국과 독일의 사운드를 비교할 수 있는 3층의 2전시실은 오디움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 중 하나다. 공간의 좌우에 각각 당시 극장에서 사용되던 미국의 웨스턴 일렉트릭, 독일의 클랑필름이 만든 라우드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데, 도슨트가 같은 노래를 두 스피커로 각각 들려주며, 각자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2층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오디오’라는 기계의 발전사를 한층 세부적으로 추적해갈 수 있는 장소다. 에디슨 매뉴팩처링 컴퍼니가 만든 축음기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크박스들을 지나면, ‘스피커의 황금기’라 불린 1927~1937년에 제작한 ‘웨스턴 일렉트릭 혼 스피커 16-A 사운드 시스템’을 만나볼 수 있는 5전시실에 닿는다. 순수하게 크래프트십에 의존해 만든 스피커로, 이를 통해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수공예적 사운드의 진수를 목도할 수 있다. 뒤이어 야외 확성용으로 사용됐던 ‘스트레이트 혼’과 유성영화 시대를 화려하게 연 ‘커브 혼 스피커’의 역사적 모델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지하 2층의 너른 라운지는 오디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정음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장소다. 약 10만 장의 LP와 앰프 컬렉션이 벽면을 가득 채운 이 공간은 마치 고대의 신전이나 극장으로 진입한 듯한 초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구마 겐고가 이 공간에 만들어낸 특별한 ‘열주’ 덕분이다. “오디오를 테마로 한 뮤지엄은 세계적으로 드물기에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기둥은 꽃의 형태를 지향한 게 아니라 약한 소재로 강한 입체감을 표현하는 패브릭의 가능성을 확인하다가 꽃의 형태가 된 것이다.” 특수 흡음 부직포를 사용한 기둥은, ‘기능’이 만들어낸 ‘형태’의 아름다움을 실감케 하는 동시에 소리를 완성하는 공간의 위력까지 보여준다. 라운지 전면에 설치된 벨기에 오르간 제조업체 모르티에Mortier의 오르간, 웅장하게 소리를 재생하는 1936년산 초대형 스테레오 시스템 ‘미러포닉 M1’ 역시 공간에 시청각적 드라마를 선사한다.
지하 2층의 라운지 공간. 벨기에 모르티에의 오르간이 자리하고, 특수 흡음 패브릭으로 마감한 아름다운 기둥이 도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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