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제주 포도뮤지엄
소환할 때마다 매 순간 왜곡되거나 재구성되는 기억의 본질적 모순과 허구성을 탐구하는
민예은의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2024). © Ye-eun Min
익숙한 사물을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연출함으로써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해 각자의 잠재된 이야기를 끌어내는
로버트 테리엔의 ‘무제(패널룸)’(2017). © Robert Therrien Estate
“노화나 인지 저하증에서 비롯한 두려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역할에 주목해보세요.” _ 총괄 디렉터 김희영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노화에 따른 인지 저하증(치매)을 주제로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전시다. 인구 고령화로 인해 여러 사회 문제가 대두되는 요즘, 이를 한발 물러서 바라본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노년의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온기를 더하고 세대 간의 공감을 모색하고자 기획됐다. 루이스 부르주아, 민예은, 시오다 치하루, 정연두, 천경우 등 참여 작가 10인은 언젠가 마주하게 될 삶의 후반기를 ‘어쩌면 더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 저하증을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의도에 맞게 작품들은 어려운 미학적 방식이 아닌, 슬픔과 무서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인류애적 사고로 점철돼 있다. 그래서인지 전시장을 걷다 보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을 사는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의 연약함과 결핍을 보듬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에 다시금 도달하게 된다. 우리 젊음이 우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당신의 늙음도 당신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므로. 2025년 3월 20일까지.
<소원을 말해봐>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나오미는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을 두고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신을 잇는 공간을 구현했다. 사진: 김상태
(좌) 관람객의 불행을 점토 조각 형태로 수집해 행운의 부적으로 탈바꿈한 홍근영의 ‘불행 수집가’(2019). 사진: 김상태
(우) 타인을 향한 상냥한 태도가 자기 자신도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하는 이원우의 조각상 ‘상냥한 왕자’(2024). 사진: 김상태
“일종의 ‘영적 여행’으로 제시된 전시는 가벼움이 삶을 낱낱이 흩어놓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존엄성과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조건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_ 학예연구사 오연서
<소원을 말해봐>(~8월 4일)는 빠른 변화와 가벼움의 시대인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통과 공생,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마련됐다. 김한샘, 다발 킴, 신민 등 8명의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고립, 불안 등의 사회적 징후 속에서 무속, 설화, 신화 속 ‘유령’ 같은 존재를 매개체로 공생과 소통, 화해를 지향하는 작품들이다. 대표적으로,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을 두고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신을 잇는 공간을 구현한 나오미, 한국의 신화나 무속 요소를 활용해 초월적이면서 지혜로운 무언가를 창조한 제이디 차와 권희수 등이 있다. 두 번째는 디지털 세계에 만연한 가벼움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기복 작품들. 관람객의 불행을 점토 조각 형태로 수집해 행운의 부적으로 탈바꿈한 홍근영, 타인을 향한 상냥한 태도가 자신도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하는 조각상을 제작한 이원우가 눈길을 끈다. 요동치는 계절의 한가운데서 공허, 불안, 우울 등의 감정이 관성으로 바뀌는 듯한 징후를 느꼈다면, 이들 작품에 다가가 소원을 말해보길 바란다. 8명의 지니가 용기와 열정을 북돋아줄지도 모른다.
<예측 (불)가능한 세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인공지능 시대 속 긱 이코노미, 플랫폼 노동의 문제를 다룬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
드래그 퀸 캐릭터를 활용, 인공지능(딥페이크) 기술에 관한 이해를 제공하고, 동시에 그것이 담아내지 못한 존재들을 제시하는
제이크 웰위스의 ‘The Zizi Show’(2020).
“인공지능의 예측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의 이야기보다는 인공지능이란 기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사유를 다시 점검하고, 새로운 상상 위에서 기술과의 공생 방식을 고민해보길 바랍니다.” _ 국립현대미술 김성희 관장
오늘날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인공지능을 돌아보고, 기술과 인간의 공생 가능성을 살펴보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의 첫 미디어 아트 기획전시. 최근 몇 년 사이 인공지능은 ‘인공’에 ‘생성’이 더해지며 인간을 대체할, 혹은 초월할 잠재력을 갖췄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머릿속에서만 그렸던 미래를 현실화하고 있지만 노동, 데이터 식민주의, 디지털 불평등 등 사회·윤리적 문제 또한 초래하는 게 사실. 이에 김아영, 슬릿스코프, 언메이크랩, 이언 쳉, 제이크 엘위스, 추수, 트레버 페글렌, 히토 슈타이에를은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인공지능과 관련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그리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고찰한다. 전시는 4개의 섹션으로 이뤄진다. ‘미래와 비미래’에서는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의 본성을 그리고, ‘생성과 비생성’에서는 창작의 역할을 부여받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다루며, ‘진화와 공진화’에서는 인공지능이 영향을 미칠 세계와 그 속의 우리 모습을 묘사한다. 더불어 ‘궤도 댄스와 두 개의 눈’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이 초래한 사회적 문제를 짚어내는데, 기획자가 구축한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공존과 공멸은 어쩌면 한 끗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어 괜스레 심란해진다. 8월 25일까지.
<수평선 위의 빛> 대전 헤레디움
창조와 파괴의 순환에 의문을 제기한 레이코 이케무라의 ‘토끼 관음상’(2022).
“이케무라 레이코는 세계를 관찰할 때 그 관점이 우주 전체를 포괄하도록 확장시켜 존재의 다양성과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문화와 역사의 발전에 이르는 수많은 측면을 인식하고자 합니다.” _ 헤레디움 함선재 관장
구상과 추상,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등 이질적 소재를 결합해 낯선 공간을 탄생시키는 이케무라 레이코의 개인전. <수평선 위의 빛>(~8월 4일) 중심에는 작가의 중요한 예술적 모티프인 수평선이 있다. 해안가에서 자란 그에게 바다는 익숙한 곳이었지만, 어느 날 열차에 앉아 바라본 풍경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강렬하고 생경했다고. 태초의 기억과도 같았던 그날의 기억은 작가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았고, 그때부터 수평선 너머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을 반기는 건 토끼의 귀가 달린 사람이 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토끼 관음상’(2022)이다. 인간과 동물의 모습, 불교와 기독교 도상이 합쳐진 동상은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때 유출된 원자력으로 선천적 결함을 갖게 된 토끼 소식에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일견 그로테스크한 이 작품은 창조와 파괴의 순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끌었다. 동양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이 깃든 산수화도 눈여겨봐야 한다. 수평선 주변의 비현실적인 공간에 인간과 동물을 묘하게 섞은 형상의 조화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심연으로 초대하는 것 같기 때문. 혹, 내면이 복잡하고 시끄러워 머리가 혼란스럽다면, 이케무라 레이코의 회화 앞에 우두커니 서 있어볼 것을 추천한다. 잠시 여행을 떠난 미지의 세계에서 따스한 위로를 받게 될 테니까.
<굿모닝 미스터 오웰 40주년 특별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아트센터 로비의 ‘TV 정원’(1974/2002) 속에서는 ‘글로벌 그루브’(1973)라는 비디오 작품이 재생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는 ‘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과 퍼포먼스, 기술과 예술을 조합한 환경에서 기술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인간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지를 제시한 백남준의 ‘TV 첼로’(2002).
“1984년 이후 쌍방향 소통 기술은 발전했지만, 백남준이 바라던 세계 평화의 가치에는 진정 도달했는지 전시를 통해 묻고자 합니다.” _ 학예연구사 김윤서
미국 공영방송 WNET와 각 도시의 방송국, 머스 커닝엄·요제프 보이스·존 케이지 등의 예술가와 손을 맞잡고 완성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암울한 감시 사회를 그려낸 조지 오웰의 소설 <1984>(1949)를 향해 “조지 오웰, 당신은 반만 맞았다”라고 외치는 작가의 목소리가 담긴 작업이다. 1984년 새해, 백남준은 전 세계 2500만 명 시청자들과 소통하며 당시 제한된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TV 방송의 문턱을 낮췄다. 오웰의 소설 속 텔레스크린이 사람들을 억압했던 것과 달리, 백남준은 TV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기술로 인식한 것. 하지만 흥미롭게도 백남준 역시 반만 맞았다. 이를 증명하는 건 모바일로 누군가를 감시하고 또 소통하는 작금의 상황이 아닐는지. 이러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탄생 40주년을 맞아 백남준아트센터는 2개의 특별전을 준비했다. 40년 전 백남준이 지향했던 세계 평화의 가치에 다시 주목한 <일어나 2024년이야!>(~2025년 2월 23일)와 정보를 분산 저장하여 공유하는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미래를 내다본 <빅브라더 블록체인>(~8월 18일)이 바로 그것. 쌍방향 네트워크를 잘 보여주는 백남준의 주요 작품과 류성실·바밍타이거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오마주한 ‘SARANGHAEYO 아트 라이브’(2024)로 구성된 <일어나 2024년이야!>는 연결 기술이 진정한 소통과 평화를 가져왔는지를, 삼손 영·홍민키·히토 슈타이에를 등이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을 표현한 <빅브라더 블록체인>은 통제에 대항하는 또 다른 미래 기술이 도래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데 의의가 있다.
<회화적 지도 읽기> 대구미술관
<회화적 지도 읽기> 전시 전경.
유영국, ‘山’, 1970년대
“방대한 지표가 총집합한 지도를 보며 길을 찾듯, 대구미술관 회화 소장품들이 품고 있는 독자적인 시각과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미술관이 걸어온 작품 수집의 길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_ 학예연구사 이혜원
오롯이 회화에 집중한 대구미술관의 소장품 기획전.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회화를 선별한 <회화적 지도 읽기>는 곽훈·안지산·윤명로·이강소·최민화 등 작가 44명의 작품 82점을 4개의 주제로 구분해 소개한다. 먼저, 자연의 무한한 절경에 취할 수 있는 ‘상상의 지형학’은 오래전부터 회화의 주된 대상이던 자연을 닮은 회화를 선보인다. 이와 함께 추상미술을 내세운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에선 붓의 리듬에 담긴 작가의 감정을, 점·선·면을 활용한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담아낸 ‘캔버스 너머의 방위각’에선 네모난 캔버스를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들의 실험 정신을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전통, 해외 생활상 등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양한 삶의 면모를 펼쳐낸 섹션 ‘축척된 현대적 삶의 지표들’은 인류의 타임라인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대구미술관이 공개한 소장품의 면면을 감상하다 보면, 절로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이란 문구가 떠오를 터. 덕분에 전시장에선 무더운 여름 지친 일상에 평안한 쉼을 선물하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 8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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