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4월호

디지털, 감성의 궤적을 그리다, 조홍래

빔인터랙티브 조홍래 대표의 디지털 아트는 기술과 감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디자인, 공간 경험, 브랜딩의 미적 확장을 도모하며, 동시에 조형예술로서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융복합적 여정이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김상곤(인물)

조홍래  디지털 크리에이티브 그룹 ‘빔인터랙티브’의 대표이자 ‘폴씨Paul C’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동서양 융합 디자인 스튜디오 ‘감프라테시앤피’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미디어 아트, 공간 디자인, 공공 미술 프로젝트 등을 통해 디지털의 미적 확장 가능성을 실험하고, 아트와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디지털의 조형성을 탐구한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기존의 물리적 공간(X, Y 축)에 시간 축(Z)이 더해지면서 

표현의 영역이 자연스레 확장됩니다.

단순한 기술적 실현을 넘어 작품의 내러티브와 사유를이끌어내는

개념적 깊이와 본질을 들여다보는 총체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문·이과 대통합’. 서울리빙디자인페어 2025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 콘퍼런스에서 ‘디지털 컨버전스가 주도하는 공간 브랜딩 시대’를 주제로 한 조홍래의 발표를 들으며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21세기를 이끄는 거대한 디지털 혁명의 힘 아래, 그 존재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는 디지털이 감성과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의 경험 속에 깊숙이 스며든다고 강조한다.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적 감성, 디지털과 조형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새로운 미적 경험을 창출하는 그의 시각을 통해, 아날로그적 감성과 내러티브를 더한 디지털이 그려나갈 미래를 들여다본다.

이번 콘퍼런스 발표 주제로 ‘디지털 컨버전스가 주도하는 공간 브랜딩 시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주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온 디지털에 ‘미적 지능Aesthetic Intelligence으로서의 확장’ 개념을 도입해 공간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리테일 공간뿐만 아니라 브랜드 공간, 공공 장소, 도시 재생 및 도시 조형 영역 등에서도 큰 가능성이 있죠. 이번 발표에서 그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자 제가 진행했던 프로젝트 사례를 중심으로 구성했어요.

‘디지털 컨버전스’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디지털 컨버전스는 서로 다른 산업 간의 융합을 돕는 디지털 기술의 ‘촉매’ 역할을 해요. 요즘은 여러 분야가 복합적으로 연결되면서 미디어도 예전처럼 평면적, 일방향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참여형 경험이 주를 이루고 있어요. 결국 ‘인식을 통한 교감과 공감’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 디자인을 포함한 미학적 영역에서도 융합적인 사고가 필수 요소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공간 브랜딩 프로젝트를 이끌어오셨는데, 그중에서도 업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자부할 만한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2017년에 문을 연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은 브랜드 경험을 미디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약 90분 동안 도슨트 투어로 운영되는데, 현대차의 정체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스폿을 체험형으로 구성한 첫 브랜드 공간이에요.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와 예술적 감각을 담은 미디어 조형물을 조화롭게 조합한 덕분에 여러 브랜드가 체험형 공간에서 예술적인 요소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흐름이 뚜렷해졌지요.

서비스 미디어를 활용한 작업도 많이 해오셨죠. 특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오래된 프로젝트지만 영화관의 TBA(Ticket Board Application) 시스템은 정말 큰 보람을 느낀 작업이에요. 10여 년 전만 해도 극장에서는 모든 정보를 종이로 전달했는데, 매번 엄청난 양이 버려지는 걸 보면서 디지털의 활용이 해결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아날로그 시계에서는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면서 시간이 흐르는 걸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지만, 디지털 시계는 숫자만 표시돼서 감이 잘 안 오잖아요? 이걸 응용해서 로비 화면에 러닝타임 바를 도입한 뒤 실시간 상영 진행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었고, 동시에 광고 플랫폼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사용자 경험(UX) 디자인과 마케팅 ROI(Return on Investment) 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극장 환경에 딱 맞는 디지털 플랫폼을 기획한 거죠. 이 작업은 롯데시네마 같은 고객사에 선제안했던 건데, 전국 100개 이상의 극장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공간을 전략적으로 마련했다는 점이 특히 의미 있었어요.

작업 전반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강조하는 게 인상적이에요. 디지털 환경에서도 이런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여전히 물리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타인과 소통하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존재예요. 그래서 스토리와 내러티브에 본능적으로 몰입하고 감동을 느끼죠.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의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확증 편향 문제가 심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사고를 확장할 기회가 줄어드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요. 이런 흐름 속에서 디지털 영역에서 콘텐츠를 다루는 저는 그런 심리적 부작용을 경계하면서도 인간적인 감성과 사고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간, 서비스, 디지털 경험이 융합되면서 디자인과 브랜딩의 경계도 점점 흐려지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에 AI 또한 창작 환경에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동시에 불러오고 있죠. 현재 AI 발전이 창작자들에게 어떤 기회와 한계를 가져오고 있다고 보시나요?
AI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창작 환경도 크게 변하고 있어요. 동시에 이를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정보 격차와 효율 차이도 점점 커지는 상황이죠. 한때 디자인 업계에서는 AI 기반 툴이 발전하면서 비전문가도 쉽게 작업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거라는 전망이 나왔고, 디자이너의 역할이 축소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디자이너들이 오히려 더 높은 경쟁력과 효율성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창작 과정에서 AI를 어떻게 접목하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달라질 테고, 이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앞으로 AI가 예술과 디자인의 창의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AI가 오리지낼러티를 흐릴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창작자의 태도와 해석이 더 큰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됐다고 봐요. 예술은 완성된 결과물보다 사고의 흐름과 에너지가 순환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AI가 기술적으로 조합한 결과물과, 창작자의 깊이 있는 태도 및 정성이 담긴 작업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어요. 특히 제가 집중하는 ‘디지털 조형Digital-Craft’에서는 물질에 대한 태도와 진정성이 중요한 요소인데, 이건 AI가 단순히 생성하는 과정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AI는 어디까지나 창작을 돕는 도구일 뿐이고, 예술적 가치는 여전히 창작자의 사고, 감각 그리고 깊이 있는 해석에서 나온다고 믿어요.

디지털 조형이라는 개념이 흥미롭게 다가오네요.
아티스트 폴씨로서 저는 뉴 미디어 디자인과 설치형 미디어 아트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진화된 조형물로서 새롭게 탄생한 디지털 아트를 선보였습니다. 전통적인 공예의 맥락에서 소재적 특성에 대해 탐구하는 동시에 디지털을 조형의 촉매로 활용하는 작업 방식에 몰두해왔죠. 최근 다시 보완해 만들고 있는 ‘비트도자’를 예로 들어볼게요. 조선 시대 사방탁자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공간 안에 구현한 입체적인 미디어 도자기는 마치 홀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백 개의 광섬유와 커스터마이징한 LED 모듈을 한 땀 한 땀 연결해 솔리드 구조판에 배치한 결과물입니다. 이를 회전체에 돌리면 빛의 잔상이 연속적으로 회전하며 깨끗하게 빚어낸 듯한 빛 덩어리 도자기가 완성돼요. 옛 도예 장인들이 물레를 이용해 흙을 빚어낸 원리에서 착안한 작업으로, 그 장인 정신과 세심한 공예적 기술에 대한 오마주죠. 특히, 이 작업은 만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페르소나를 명상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미디어의 기술력을 더해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최근에는 작업과 관련해 명상적 활동에 주목하고 계신다고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 작업은 주로 빛과 그림자의 대비에서 오는 극적인 미감, 시간의 흐름과 인식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연작 형태로 이어져왔기에 자연스럽게 명상적 접근과 맞닿게 된 것 같아요. 또 모태 신앙인으로 자라면서 신의 존재, 죽음, 삶의 의미 같은 본질적인 물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기회가 주어진 덕분이기도 하고요. ‘자신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유명한 라틴어 문장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처럼 유한한 삶을 자각할 때 더 큰 가치란 무엇일지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가 저 자신을 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모든 작품이 엄숙하거나 무거운 주제만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요.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빔인터랙티브의 대표로도 활동하고 계시죠. 기업 운영과 창작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방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상상 우선주의’를 최우선으로 삼아왔어요. 상상을 바탕으로 감성 기획, 예술 그리고 기술을 융합해서 좀 더 나은 기준의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지금 빔인터랙티브는 제 미디어 아트 작업과 디지털 조형 작업의 프로덕션 기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특히 덴마크 출신 작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이끄는 스튜디오처럼 사회적 주제 의식을 담은 예술적 설치물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하는 그의 스튜디오 운영 방식도 저한테 많은 시사점을 줬고요. 저 역시 창작과 제작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어요.

올해 공개 예정인 작품이나 프로젝트가 궁금합니다.
상반기에는 강원도 평창 평화테마파크의 대표적인 공공 미술로 선정된 ‘빛의 캔버스’ 연작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길이 100m 규모의 건물 파사드에 표현되는 영상과 조형물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특별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거예요. 올여름에는 이탈리아 하이엔드 브랜드 까르텔Kartell의 플래그십 스토어 전체 공간 디자인도 공개됩니다. 단순한 매장 디자인이 아니라 리테일 매장 윈도의 판도를 뒤바꿀 미디어 연출을 구상 중이에요. 제 아이디어가 그대로 실현된다면, 완전히 새로운 공간 경험을 선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궁극적으로 목표하거나 꿈꾸는 바는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미국 화가 로버트 헨리Robert Henri가 이런 말을 했어요. “목표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는 멋진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오롯이 정립하고, 창작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오리지낼러티가 담긴 예술 작품을 한데 모은 미디어 아트 전용 뮤지엄과 갤러리가 결합된 공간을 준비하고 있어요. 핵심은 창작자들이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에요. 저도 그 공간 안에서 온전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라요.


WRITER  손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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