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2월호

KOREAN CRAFT 2 - 한지, 무한한 가능성을 담아

특유의 생명력과 치열한 장인 정신이 담긴 한지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옥과 가구, 공예, 생활 소품 등의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재료적 우수성과 현대적 활용성 그리고 심미적인 측면에서 그 어떤 소재보다도 다채롭게 형태를 변화하고 확장하는 지금의 한지에 대하여.

EDITOR 이호준

양정모 작가의 조명 설치 인스톨레이션 작품 ‘Paper Lamp, New Typologies TYPE7’(2022).


견오백지천년 絹五百紙千年, 비단은 500년 가고 종이는 천년을 간다는 뜻이다. 8세기경 탄생한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이자, 한지에 찍어낸 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형태가 온전하다. 한지는 중국의 선지, 일본의 화지와는 다르다. 외발뜨기와 천연 염색 등 고유의 제작 기법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덕택에 변색되지 않고 강인하며 견고하다. 예부터 한지를 ‘백지百紙’라 불렀다. 그 빛깔이 희고 고와 백지라고도 하지만, 만드는 이의 손이 아흔아홉 번 가고, 마지막으로 쓰는 이의 손을 한 번 더 타 100번을 채워야 완성되는 종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한지는 앞물을 떠서 뒤로 버리면서 섬유를 세로로 누인 다음 좌우로 물을 떠서 버려 만들기에 섬유가 좌우로 교차해 있다. 한지가 찢거나 잡아당길 때 견디는 힘이 강한 이유다. 또한 미생물이 잘 번식하지 않고 단열 효과와 통기성이 좋으며 습도 조절에도 도움을 줘 부패를 막아준다. 질감은 부드럽고 내구성은 강하며, 보온과 통풍이 뛰어나고, 스스로 항균 작용을 하기에 한지로 창호와 장판은 물론 가구·옷·우산까지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한국에서 자란 닥나무는 광택도 좋고 섬유장의 길이도 길다. 섬유장이 짧으면 산화되는 시간도 짧다. 산화는 곧 노화와도 연결된다. 즉, 섬유장이 길수록 강도가 높고 노화되는 시간이 늦춰져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한지는 202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습니다. 또한 루브르박물관과 바티칸미술관에서도 문화재를 복원하기 위한 최적의 재료 중 하나로 한지를 주목하고 있어요. 우리 한지의 우수성이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통문화확산본부 김태완 본부장의 말이다. 우리 전통 유산인 한지의 재료적 우수성은 현대에 이르러 활용성 측면에서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 메종 & 오브제에서 ‘한지’를 주제로 한 전시가 매해 꾸준히 마련되는 이유도 이러한 흐름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지난해 12월, 4년 9개월 만에 전주한지박물관이 재개관 소식을 전한 것 역시 유의미하다. 또한 한국공예문화진흥원에서는 지난해 6월, 기존 ‘한지문화산업센터’로 운영하던 한지 문화 홍보 공간을 ‘한지가헌’, 즉 한지의 집이라는 이름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경하며 본격적으로 한지의 저변 확대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는 바로 한지 제작 기술의 계승이다. 제작 현장의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전통한지의 명맥은 계속해서 위협받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2000여 곳이던 한지 공방이 이제는 20여 곳밖에 남지 않았다는 데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는다. 이에 대해 김태완 본부장은 말한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대표 기관입니다. 한지가헌을 통해 생산 기반 확대와 유통 채널을 확장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전국 18개 한지 공방 장인들과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종이를 아카이빙하는 건 물론, 문화 상품이나 기획 전시를 마련하는 등 쓰임새를 새롭게 발굴하고 다양화하는 데에도 만전을 가하는 중이죠. 하지만 우리의 문화 자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꾸준한 관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치를 알아야 지키니까요.”

동시대 창작자들의 예술적 미감과 만나는 순간, 한지의 가치는 다시금 가능성을 발휘한다. 유연하고 견고한데다 지승과 지호 등 선조들이 시도하고 발전시켜온 여러 전통 공예 기법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변용의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 이를 증명하듯 지금 현재도 한지를 소재로 한 예술의 장을 발견할 수 있다.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와 협력해 열리는 기획전 <일상의 매혹-현대민화의 변주곡>이 한지가헌에서 열리고 있으며, 수천 개의 한지 조각으로 조형예술 세계를 굳건하게 구축해온 전광영의 개인전 <집합:공명과 그 사이> 역시 가나아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주에서는 지화 공예가 이미나 작가와 협업해 조선 시대 궁중의 독특한 꽃 장식 문화인 ‘궁중상화’를 테마로 한 기획 전시 <한지로 되살아난 왕실의 꽃>을 선보인다. 이렇듯 얇지만 강건한, 무결하고도 고아한 한 장의 종이에서 물성에 대한 실험은 물론, 형태와 질감, 특성에 관한 변칙적인 접근법 등을 시도하는 작가들에 의해 한지의 쓰임새는 점차 그 경계를 넓혀가는 중이다.



빛과 한지로 만든 예술 언어, 권중모


권중모 작가는 한지의 매력을 투과성으로 꼽는다. “한지는 얇고 촘촘한 섬유질로 이뤄져 있음에도 마치 투명한 듯 빛을 투과시킵니다. 빛과 만났을 때 부각되는 종이 표면의 질감을 눈으로 보면 기묘한 경외감이 들어요.” 그의 작품은 모두 빛과 한지가 만났을 때 은은하게 퍼지는 음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명을 디자인할 때면 한지의 두께 차이에 따라 투과되는 빛을 어느 정도로 맞출 것인지를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긴다. 그리고 한지를 평면적으로 접거나 때로는 직관적 감각에 따라 겹겹이 접어가며 패턴을 만든다. 한지가 접힌 간격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투과율과 겹의 패턴에 따라 생기는 음영은 한폭의 산수화와 같은 은은한 매력을 풍긴다.



흐릿한 안개를 품은 가구, 손상우


손상우의 모든 작품은 ‘안개’에서 시작된다. “저는 안개를 개체가 아닌 공간으로 이해합니다. 안개가 불러 일으키는 불확실성은 무정형의 혼돈 그리고 현존과 부재의 양면성을 보여주지요.” 작가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한지와 합성수지인 레진, 경화제를 혼합해 틀에 붓고 굳혀 불투명한 이미지를 시각화한다. 전통의 산물과 현대에서 탄생한 합성수지의 이질적인 물성이 하나가 된 가구를 응시하다 보면 마치 ‘부유하는’ 안개를 가둬놓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한 장의 한지를 통째로 넣고 섞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갈기갈기 찢은 다음 레진과 혼합해 탄생한 것이라고.



너울대는 아름다움, 양지윤


양지윤 작가는 한지를 빛, 바람, 물, 식물과 같은 자연의 본질적 요소를 표현하기에 탁월한 매체로 바라본다. “닥나무 섬유로 만든 한지는 투명도와 질감을 통해 자연의 빛과 온기를 담아내며, 그 자체로 조형 언어로서 기능합니다. 한지의 투과성과 테두리에 살아 있는 닥 섬유는 제 작업에서 자연의 섬세함과 따스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핵심 요소죠.” 한지를 자신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는 핵심이라 말하는 양 작가는 다채로운 범주의 작품을 창작하지만, 무엇보다 ‘랄랄라’, ‘물의 모양’ 등 그의 손에서 탄생한 대형 행잉 오브제는 한지 본연의 매력이 극대화된 것이 특징. 작품을 구성하는 작은 한지 조각들이 공중에 매달린 채 바람에 너울거리며 빛을 받아내는 모습을 보며 작가는 한지를 “빛과 바람의 종이”라 정의했다.



생명을 얻은 빛 조형물, 오샛별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오샛별 작가는 2013년 자신의 성씨인 오Oh와 독일어로 ‘빛’을 뜻하는 리히트Licht를 합친 오리히트Oh-licht 브랜드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조명이라는 표현 대신 빛 조형물로 소개한다. 독일 북부의 어둡고 긴 겨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온기 어린 빛이 필요했는데, 마음에 드는 조명이 없었어서 직접 만든 것이 작업의 시작이라 말한다. 주재료는 한지로, 재료는 모두 한국에서 조달한다. 현지에서는 빛을 뿜어낼 정도로 얇으면서도 튼튼한 종이를 구하기 힘들뿐더러 한지 특유의 신축성에 매료됐기 때문. 그가 만드는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비정형의 형태와 총천연색으로 변주되는 유기적인 모습의 조형물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를 연상케 한다.



공간에 깃드는 지등의 빛, 양정모


“멋은 감출수록 드러나고, 간결할수록 배가된다고 생각합니다.” 양정모의 손에서 탄생하는 지등은 분명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놓여 있지만, 유행하는 조형 언어나 화려함을 좇지 않는다. 그 어떤 문양이나 장식적인 요소 같은 형태적 기교 대신 한지 고유의 특징과 조명의 본래 용도에 집중할 뿐이다. “대나무를 감고 형태를 잡아 그 위에 한지를 붙이는 지등 제작 방식을 연구해왔습니다. 한지는 언뜻 얇고 연약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튼튼합니다. 통기성도 좋고, 묘한 광택도 감돌죠.” 본질에 충실한 작품이기에 어떠한 공간에 놓여도 온화하고 유연하게 본연의 자태를 유지한다.



새 길을 여는 한지, 이선


이선은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다 네덜란드로 넘어가 소셜 디자인을 공부하며 전통 공예와 산업화의 영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지는 제 작업의 키워드인 처분 가능성과 지속 가능성에 적합한 소재예요. 또 변화무쌍한 것 역시 장점이죠. 어떤 기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모습이 천차만별 달라지니까요”라고 작가는 말한다. 변화무쌍한 한지의 특장점과 다양한 기법을 결합해 전통 공예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그는 지승 공예와 핸드 위빙 태피스트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조끼를 만들기도 하고, 조형성을 강화한 한지 탑을 만드는 등 장르를 횡단하며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는 중이다.



COOPERATION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주한지박물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