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1월호

그리고 박경미가 있었다

침체의 그림자가 드리운 2024년 미술 시장에 PKM갤러리가 한줄기 빛을 밝혔다. 단순한 작품 판매를 넘어 작가의 작업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한 전시들은 보는 즐거움과 아는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가 있었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김상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 한국과 미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89년부터 1999년까지 국제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재직한 뒤 2001년부터 자신의 영문 이름 이니셜을 딴 PKM갤러리를 이끌고 있다.



2024년 미술 매체와 애호가 사이에서 호평을 받은 갤러리를 꼽자면, 단연 PKM갤러리일 것이다. 유영국과 윤형근을 시장에서 주목받게 한 것을 넘어, 작품의 의미를 재조명한 전시로 국내외 미술인들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 이와 함께 사진을 통해 인식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 토마스 루프, 긴장감과 에너지의 응축을 추상 화면에 표현한 신민주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PKM갤러리는 지난 한 해 다양한 미술 작품을 내세우며 미술계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는 지점을 마련했다. 이러한 PKM갤러리를 이끄는 박경미 대표를 만나 작년 활동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PKM갤러리의 전시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추상미술’입니다.

추상성을 표현하는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추상 작업에만 집중하지는 않았어요. 지난 3년 동안의 전시를 예로 들면,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 김지원 작가의 회화는 형상성을 띠고 있죠. 멀티미디어 전시도 기획했고요. PKM갤러리는 미술은 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매개체라 믿고, 자기와 세상의 연결성을 구현한 작가들의 작업을 시의적절하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2024년은 ‘추상미술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인상이 강해요. 토마스 루프, 신민주, 윤형근, 유영국 등으로 라인업을 구성했기 때문이죠.

토마스 루프는 사진의 기능과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작가예요. 전시 속 작품은 프랙털이 형성하는 추상적 이미지였으나, 평소 그가 일관되게 추상성을 추구하진 않죠. 그 후의 전시 라인업도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에요. 윤형근, 유영국 작가는 이미 자신의 화업을 이루고 세상을 떠난 분들입니다. 가볍고 들떠 있는 현시점에서 당시 자신들의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고 고민하며 일생을 바쳐 예술을 추구한 분들이 시대정신을 어떤 결과물로 구현했는지를 펼쳐 보이고 싶었습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에서 개최한 유영국의 <무한 세계로의 여정> 전시 전경.


이탈리아 베네치아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에서 개최한 유영국의 <무한 세계로의 여정>은 ‘한국 최고의 모더니스트를 만나는 시간’, ‘꼭 봐야 하는 전시’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연의 선과 면을 옮겨놓은 듯한 건축과 작가의 작품이 하나가 된 것처럼 다가왔어요. 서양 관객의 반응도 뜨거웠죠?

유영국 작가는 국내에선 김환기 작가와 함께 이미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죠. 2023년 페이스갤러리 뉴욕에서 개인전 을 진행했지만, 규모가 큰 기관 개인전을 통해 서구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서구 언론과 관객들이 그의 작품 세계를 극찬하며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 공간의 맥락과 부합한 덕분이에요. 더불어 한국 문화가 각광받으면서 편견을 거두고 작가와 작업 본질에 순수하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선 <유영국의 자연: 내면의 시선으로>가 열렸습니다. 베네치아 전시가 작가의 전성기인 1960~1970년대에 초점을 맞춘 반면, 서울 전시는 1950~1980년대 작품을 선보였는데요. 시기를 달리해 작품을 소개한 이유가 있나요?

베네치아 전시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추상성이라는 화두를 정점까지 밀어붙이며 작업한 결과물을 통해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했던 때 작가의 예술 정신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한편, 서울 전시는 생전 거의 공개하지 못했던 작은 회화 작품에 초점을 맞췄어요. 대작도 출품됐지만, 전시를 본 분이라면 작은 그림의 기운이 큰 그림에 밀리지 않는다는 걸 느끼셨을 거예요. 작은 그림 역시 온전하게 아름다운 하나의 우주였다고 할까요?


작가가 파리에 머물렀던 1980~1982년과 2002년 전후 작업으로 공간을 구성해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던 <윤형근/파리/윤형근> 전시도 짚고 넘어갈게요. 대중에게는 ‘BTS RM이 사랑하는 작가’란 인식이 강한데, 윤형근 작가가 내세운 개념인 진리와 진실이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작고한 작가는 대규모 미술관 회고전이 열리기 전까지 작가 생애 전반에 걸친 작업의 변모와 시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윤형근 작가는 저희가 10년에 걸쳐 아카이브를 정리하면서 그의 작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떤 실험을 했는지 등을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윤형근/파리/윤형근>은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에서 개최한 <윤형근/파리> 전시의 연장선이에요. 작가가 유일하게 장기 해외 체류한 곳이 1980년대 초 파리였습니다. 이 시기는 윤형근 작가가 생경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새로운 것으로 채운 것이 아닌, 완전히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확신을 얻고 돌아온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가 한결같이 했던 말은 “모든 가치의 최상위는 ‘진실됨’이다”였어요. 아름다움도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 진실됨이 아름다움의 최상위에 자리한다는 의미인데, 오늘날에도 윤형근의 가치관이 울림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요.


PKM갤러리에서 열린 <윤형근/파리/윤형근> 전시 전경.


전속 작가와 오랜 시간 인연을 맺고 계신 것처럼 보여요. 전시 이력을 보면, 현재 미술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작가들이 예전엔 젊은 작가로 PKM갤러리 전시에 참여했더군요.

갤러리와 작가의 관계는 동반 성장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합니다. 한 번의 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성장하는 파트너십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나 이 과정이 쉽지는 않아요. 당연히 젊은 작가가 동시대와 호흡하는 건 자연스러운 건데, 전속 작가는 여기에 다른 시각이 더해진 모습까지 살펴봐야 하니 매우 어렵죠. 하나의 시그너처 이미지에 의존하는 것보다 작업 맥락을 다방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작가를 선호합니다.


여전히 젊은 작가에게 상업 갤러리의 문턱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만.

앞선 답변과 비슷한 맥락인데, 빠른 소비보다는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에요. 시장에서 바로 팔리지 않더라도 작품의 서사가 확실한 작가들이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대중에게 빨리 어필하는 작가를 섭외하면 수익은 올라가겠지만, 그런 작가들은 빠르게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하더라고요. 이젠 그 속도를 못 쫓아가요.(웃음) 요즘 젊은 작가들은 전속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희는 작가와 함께 긴밀하게 롱런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단 어른들의 고정된 관념으로 젊은 사람들의 사고를 재단하지 않으려고 해요.(웃음) 그 안에서 시대와 맞는 신선한 가치관, 정신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100% 옳고 틀린 게 어디 있겠어요.


잠시 흘러간 시간을 들춰볼게요. 1999년 인터뷰에서 “1980년대 후반 거래되는 작품은 모던 마스터 일색이었다. 원로 작가나 컬렉터의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 젊은 작가들을 상업적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전망이 높다고 사장을 설득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과거 갤러리 직원으로서 내린 분석이 갤러리 대표의 관점으로 이어졌나요?

저 말을 했을 때 한국 미술 시장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유영국, 변종하 등 모던 마스터들의 작품만 드물게 팔릴 정도였어요. 단색화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고요. 하지만 서울 올림픽 이후 글로벌화되면서 한국 미술계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해외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에게 관심을 나타냈고, 해외 작가에게 눈을 돌리는 우리나라 컬렉터층도 태동했죠. 그래서 제가 주장한 것이 “국제주의 미술로 가야 한다”였습니다. 때마침 등장한 작가들이 육근병, 이불, 조덕현 등이에요. 우리나라 시장에선 주목받지 못했지만, 해외에선 점점 반응이 생기고 있었죠.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주의 흐름이 한국 미술계의 미래라는 점을 통찰력 있게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PKM갤러리 소속 작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숨결의 지구’(2024).


그렇다면 20년 넘게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국제성 있는, 즉 동시대 미술과 궤를 같이하는 작가들의 작업 세계는 어떻게 변화했나요? 가령, 태도와 형식, 담론 같은?

우리 세대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입니다. 신표현주의를 중심으로 미술 시장이 호황기를 보낸 이후 비디오 아트가 대두된 시기죠. 이때는 작가들이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았습니다. 회화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매체로 작가들이 시선을 돌렸거든요. 이제 와서 하는 우스갯소리지만, 그때 상업 갤러리는 판매할 작품이 없어 힘들었어요.(웃음)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피로감을 느끼나 봐요. 미술계의 타임라인 위에선 ‘위기와 대안’이 순환하는데, 얼마 전부터 패러다임이 바뀐 것을 보면. 접근 문턱이 낮아 개인 공간에 놓을 수 있는 소품이나 공예가 늘어난 것이 이를 방증합니다. 담론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가장 뜨거웠던 것 같아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내용이 많았다고 할까요? 지금은 동어반복 혹은 부재의 시기로 보이는데,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사이클이 지나면 새로운 무언가가 나올 거예요.


2006년 붐이 일었던 미술 시장이 침체를 겪다가 코로나 19 때 좋아지고, 2023년 말부터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활황이라는 것은 평소 미술에 흥미가 없던 사람들까지 시장에 뛰어드는 현상을 말하죠. 확실히 최근 들어 열기가 식었어요. 그동안 시장이 너무 유행에 경도되고, 특정 작가의 작품이 경매에 빈번하게 나왔는데, 이는 미술 시장에 긍정적 요소는 아니었다고 여겨집니다. 2025년도 숨을 고르고 균형을 되찾는 시점으로 보여요. “컬렉팅은 귀가 아닌, 눈으로 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일희일비하지 말고, 천천히 자신만의 미적 기준과 직관을 바탕으로 삶에 에너지를 주는 작품을 선택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올해 전시 계획을 살짝 귀띔한다면?

현대미술의 다양성 전개에 초점을 맞췄어요. 일러스트레이터 샘바이펜과 포스트 단색화의 서승원, 인공과 자연의 경계를 허무는 구현모, 역사와 사회를 예리하게 바라보는 홍영인, 조각으로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주는 정현 작가 등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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