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M> 2024년 12월호

아티스트 박기원, 공간과 예술의 공존

박기원 작가는 공간의 실재와 예술적 환상 사이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얻는다. 공간 전체를 시노그래피처럼 작품화하는 그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응시와 감상이 아닌 오감으로 체험할 것을 제안한다. 공간과 예술, 관객이 조화로이 상생하는 순간 그의 예술이 비로소 작동한다.

EDITOR 이호준 PHOTOGRAPHER 이기태

박기원  공간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작업의 주요 소재로 다룬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에 머물기보다 일종의 체험과 같은 경험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이 작품의 일부로 존재하게 한다. 박기원은 서울식물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베이징 갤러리아 콘티누아,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그리고 서울 아르코 미술관과 313 아트 프로젝트, 공간화랑 등에서 개인전을 했고,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었으며 2년 전, 김세중 조각상을 수상했다.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의 감각을 환기시키는 최적의 매체는 바로 예술이었다. 감상자는 대개 작품을 응시하는 행위를 통해 방대한 사유의 장으로 들어선다. 창작의 무대가 그저 사각 캔버스가 아닌 전시장 전체라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관람객은 ‘시각적 감상’을 통해 바라보고 집중하는 행위를 넘어 전시장을 거닐며 눈과 귀, 피부로 와닿는 ‘체험’의 영역으로 변신한 공간에서 주체로 거듭난 채 작품과 조응하기 때문. 박기원 작가 역시 주변에서 쉬이 찾을 수 있는 일상적인 재료를 활용해 전시장 자체를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삼는다. 이어 전시 공간과 작품 간 경계를 허물고 마침내 관람객을 그 속으로 자연스럽게 입성시킨다. 장소-관객-작품 3가지의 요소를 동일 선상에 두고 각 요소가 상호 작용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것이다.

물론 박기원 작가가 처음부터 공간 프로젝트를 전개해온 것은 아니다. 초창기 그는 회화나 조각 등을 주로 제작했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은 공간 작업과 동일한 맥락으로도 읽힌다. 평면 회화임에도 입체감이 느껴지고, 입체적인 조각임에도 한편으로는 평면적인, 공간적 사고가 돋보이는 결과물을 창작했다는 의미다. 더욱이 채색이나 표현을 위한 유화물감이나 아크릴물감, 파스텔 등은 물론 나무나 종이, 철 등의 소재, 심지어는 사진을 활용하는 등 재료를 향한 모험심 또한 지대했다.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도 회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작업 초기부터 입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나무와 종이, 사진 등 서로 다른 물성을 이용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간을 작업의 토대로 삼게 된 계기는 마치 우연처럼 다가왔다. 박기원 작가는 전시를 위한 화이트 큐브가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건물 내벽, 장식이나 작품이 걸리지 않은 텅 빈 벽을 보며 내면의 울림을 느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 어떤 구체적 근거도 없는 계시처럼 들릴 법하나 이는 작가에게는 분명한 변곡점이었다. “공간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벽에 유독 시선이 가더군요.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벽을 보며 어떤 작품을 구현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저 자신을 봤습니다.”

그간 박기원의 전시를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면 그의 작품이 대부분 공간 특정적 성격을 띠는 것을 알 수 있을테다. 이를 위해 작가는 작품의 토대가 될 장소를 세밀히 관찰하고 측정하면서 공간의 고유한 분위기를 포착하는 것을 작업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다만 작품 구상에서 벽을 세우거나 허무는 등 공간의 기존 형태를 변형하는 건축적인 방식 대신 빛, 색 등 비물질적 재료로 공간 본연의 특질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이와 동시에 작품에 사용할 소재를 모색하는데, 분명 작가가 구현해낸 설치미술은 관람객에게 생경하고도 비일상적인 공간을 선사하지만 이를 구성하는 요소만큼은 더없이 일상적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이나 비닐, 플라스틱 보드 등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재료가 낯설고도 환상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자재가 되는 셈. 이러한 점을 빌려 탄생하는 것이 바로 ‘박기원식 공간’이다.

작가는 라인문화재단의 문화 공간 ‘프로젝트 스페이스 라인’의 개관전이자 보태니컬 아티스트 박소희와의 2인전 <모든 조건이 조화로울 때>를 통해 또 한번 예술 공간을 구축해냈다. 전시는 ‘회색 고층 건물만이 즐비해 무목적성으로 가득한 메트로폴리탄에 홀로 자리한 문화 공간이 마치 삭막한 도시 속에 마련된 중정이지는 않을까?’라는 재치 있는 발상으로 시작됐다. 박 작가는 전시장 2층에 LED 조명과 민트색 컬러 비닐을 활용해 마치 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시노그래피를 펼쳤다. 공간 중심부에 박소희 작가의 식물 작품을 배치해 가상의 중정을 구현했는데 작품명마저 ‘중정’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두 눈 가득 펼쳐지는 경이로운 예술경, 그 속에서 일상에서 벗어난 비현실적 체험을 경험하고 싶다면 도심 속에 불현듯 나타난 작가의 환상 중정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지.



INSPIRATION IN LIFE

공간에 예술을 덧입혀 환상의 무대를 구현하는 박기원 작가의 하루하루를 구성하는 것들.




라인문화재단이 설립한 신규 문화 공간 ‘프로젝트 스페이스 라인’의 개관전 <모든 것이 조화로울 때> 전시 전경. 보태니컬 아티스트 박소희와 함께 꾸린 전시에서 작가는 해당 전시와 공간이 삭막한 회색 도심 속 중정이 되길 바랐다. 이러한 바람과 상상이 전시장 2층에 고스란히 실재하고 있다.



작업실 한편에 자리한 라디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작업실에 출근한 뒤 작품 구상을 위한 스케치에 들어서기 전 라디오를 튼다.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작업실에서의 일상을 시작한다.



<모든 것이 조화로울 때>는 전시장 내 3개 층을 모두 활용하는 대형 전시다. 그중 3층에 자리한 작품 ‘허공 속으로’를 구성하는 금속 구조물의 모크업 버전.



박기원 작가의 작품은 공간을 무대로 펼쳐진다. 기존 공간이 박기원식 예술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모형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작업실 한쪽에는 그간 진행했던 설치 프로젝트 모형이 마치 훈장처럼 자리하고 있다.



부천시에 자리한 작가의 작업실 내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또 하나의 전시를 체험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작업 공간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예술 작품에 가까운 인상이다. 벽면과 창에 그의 패턴 드로잉과 한지 위에 그린 회화 작품 ‘넓이’ 시리즈가 차지했다.



레트로 분위기의 건물과도 조화로운 패턴 드로잉이 가득한 문을 보는 순간 ‘아, 이곳이 박기원 작가의 작업실이구나!’라고 알아챌 수 있었다.



박기원 작가의 작업 노트. 한 장 한 장 그의 부단한 노력이 기록되어 있다. 해당 페이지에는 전시장에 배치할 구조물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 사용된 형형색색의 컬러 비닐 역시 곳곳에 자리했다. 창에 붙인 컬러 비닐이 살랑이듯 나풀거리는 모습이 기묘한 안정감을 준다.



오일 스틱, 유화 물감, 아크릴 물감, 파스텔 등의 채색 재료들이 즐비한 책상.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즐겨 사용하는 작가 답게 작업실 내에는 금속, 비닐, 아크릴 보드, 철사 등 만물상을 방불케 할 만큼 다양한 자재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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