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영화라는 소우주, 변성현

창작자의 특권은 오롯이 나의 뜻만으로 이룬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길복순>으로 돌아온 변성현 감독은 다시 한번 영화적 상상으로 무장한 세계를 선보였다.

EDITOR 이호준 PHOTOGRAPHER 김영준

디테일한 패턴의 검정 수트 세트업은 잔키. 흰색 이너 티셔츠와 검정 첼시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변성현  2012년 <나의 PS 파트너>를 통해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첫걸음을 선보인 후, 재개봉과 재관람 열풍을 일으킨 2017년작 <불한당>을 통해 많은 팬덤을 거느린 감독으로 거듭났다. 2022년작 <킹메이커>로 대종상 영화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넷플릭스 개봉작 <길복순>을 공개하며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17년 개봉작 <불한당>은 n차 관람, 팬덤 ‘불한당원’ 형성 등 영화계에서 유례없이 열렬한 추종자들을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배우 설경구와 임시완을 내세운 이 작품은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차후 입소문을 타며 가치가 재조명되는 진귀한 현상의 주인공이 됐다. ‘영화에 빠지다’라는 의미의 일명 ‘감기다’라는 표현이 새로 생길 만큼 열렬한 반응을 만들어낸 것. 이례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이 영화는 감독 변성현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후 그는 설경구, 이선균 투톱주연의 2022년작 <킹메이커>에 이어, 올해 넷플릭스와 함께 메가폰을 잡고 전도연 원톱 주연의 영화 <길복순>을 공개했다. <길복순>은 7주 연속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 톱 10에 들어가면서 매주 기존 넷플릭스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대표 히트작으로 자리했다. 또 한번 자신의 작품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대중에게 찾아온 변성현 감독을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마주했다.


영화 <길복순>으로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에서 무려 7주 연속 ‘톱 10 차트 인’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소감이 어때요?

넷플릭스는 흥행 지표가 다양하더라고요. 전해 듣기로는 <길복순>이 이탈률이 굉장히 낮은 영화라고 하던데, 한번 영화를 틀어두면 도중에 영상을 멈추거나 끄지 않는다는 뜻이래요. <나의 PS 파트너> 이후로 대중적인 성공의 지표에 든 영화가 제 기준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마운 작품이죠.


<길복순 2>가 나온다면 시나리오에는 참여할 생각이 있지만, 감독은 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던데요. 자신이 만든 영화인데, 아쉽지 않아요?

전 매번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싶거든요. 길복순의 두 번째 이야기를 그리려면 다시 액션 장르를 다뤄야 하잖아요. 시나리오 집필은 참여하고 도움을 필요로 할 때면 늘 나서겠지만, 감독으로서는 힘들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전도연 배우와 처음 합을 맞추게 됐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전도연 배우를 염두에 두었다고요.

전도연 배우를 생각하며 쓴 시나리오지만, 배우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하고 싶었어요.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때 섬세한 감정 연기를 필요로 하는, 드라마적 성향이 짙은 연기자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장르부터 정했죠. 액션! 배우에게도 “저랑 액션 영화 한번 해보실래요?”라고 물었는데, 농담으로 들었는지 웃더라고요.


킬러와 엄마. 쉽사리 매칭되지 않는 두 역할을 하나의 인물이 수행한다는 점도 재밌었어요.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영화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아이러니하잖아요. 밖에서는 비정하게 사람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킬러가 집에서는 딸과의 갈등에 난감해하는 상황을 떠올리니 재밌더라고요.


설경구 배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불한당>, <킹메이커> 이후 세 번째 작품까지 함께하다 보니 두 사람의 관계를 ‘페르소나’라고 정의하는 분들도 많더군요. 동의하시나요?

많은 분이 오해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아요. 전 단 한 번도 제 인격을 투영한 적이 없거든요. 다만 설경구라는 배우에게서 이제껏 보지 못한 모습을 끌어내고자 했을 뿐이에요. <불한당>이 함께 합을 맞춘 첫 작품이었는데, 설경구 배우가 맡은 한재호라는 인물은 속된 말로 ‘쌔끈한’ 남자예요. 그가 이전에 맡아온 역할은 대개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로 분류되는 수더분한 이미지의 인물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배우는 어떠한 모습이든 될 수 있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전형이 되는 배우가 바로 설경구라는 사람이죠.



투 모디파이드 화이트 빅 칼라 셔츠는 데일리미러. 레오퍼드 스퀘어 선글라스는 스테판 크리스티앙. 볼드한 금색 귀고리는 에스트리. 반지는 아진코.


이젠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됐을 것 같은데요.

매일 연락하거나 만나지는 않아요. 정말 친한 비즈니스 파트너랄까?(웃음) 서로 뜸할 때쯤 술 한잔하는 동네 형님 같은 분이에요. 아,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최근에 기사 하나를 읽었는데, 헤드라인이 “변성현×설경구 조합, 이제는 지겹다”였어요. 저도 세 작품을 연달아 하다 보니 네 번째 작품은 다른 배우와 호흡을 맞춰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기사를 보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제가 청개구리 기질이 좀 강한 편이라.(웃음)


영화를 본 많은 대중이 꼽는 감독님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미술적 장치를 작품의 적재적소에 도입한다는 점이에요. 공간과 상황에 따라 조명과 색을 각기 다르게 도입한 시노그래피는 훌륭한 서브텍스트가 되어 관객의 영화적인 상상의 나래를 한층 확장시켜주니까요.

소설과 명확히 다른 지점이죠. 영화는 영상 언어잖아요. 저는 영화에서 서브텍스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고 나면 제일 먼저 한아름 미술감독님과 상의해요. 장면마다 어떤 스타일을 보여줄지, 색과 소품은 어느 분위기로 준비할지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거든요. <불한당>에서는 레드와 옐로, 블루 컬러를 활용해 교도소와 사회의 이미지 그리고 인물 간의 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면, <킹메이커>에서는 빛과 그림자를 활용했어요. 그리고 <길복순>에서는 보색 관계인 레드와 그린을 키 컬러로 사용했죠. 레드로 대변되는 킬러의 세계와 대조되는 가정의 모습은 그린의 세계에 속하게 말이죠. 일례로, 딸 길재영에게 시금치를 먹이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엄마를 닮아 ‘레드’의 본능을 지닌 길재영이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린’의 세계에 머물렀으면 하는 엄마 길복순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 거예요. 배우들이 세트나 미술 소품을 보고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감정의 갈피를 잡는다는 말을 들을 때면 말은 안 하지만 미술감독이나 저나 남몰래 뿌듯해해요.


인물 간 이해관계와 갈등의 층위를 세심하게 설정하고 표현하는 것 또한 작품의 핵심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갈등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들이 한때 결집하다가 결국은 와해되는 서사의 원인이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는 점이 유사하다는 것 또한 흥미로워요.

시나리오를 쓸 때 굳이 인물 간의 관계를 망가뜨려야겠다고 다짐하는 건 아니에요. 절대로 의식하고 그런 결말을 만든 게 아니거든요. ‘제가 어딘가 결핍되어 있나?’라는 생각도 해봤어요. 친구가 제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과의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 같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저는 사랑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어떠한 종류든 간에 사랑이 기저에 자리하니까요. 그렇기에 가장 두려운 감정이기도 해요. 누군가와 헤어지고 관계가 와해되는 것도 사랑이 휘발되었거나 너무 넘쳤기 때문일 테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영화 속 인물들이 파국으로 치달을 때, 사랑이 지닌 파괴적인 면모를 목격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어요.

분노도, 두려움도 결국은 사랑에서 파생되는 감정이지 않나요? 사랑해서 분노하고, 사랑해서 두려워하고, 사랑해서 슬프고, 사랑해서 기쁜 것처럼요. 인간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할 때면 결국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거든요. 절대 안할 것 같은 일을 하고 보면 결국 누군가를 너무 좋아해서 한 행동이더라고요. 잃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거죠.


시나리오 작업도 직접 하는 편인 만큼,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받기도 할 텐데요. 주로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나요?

작품마다 달라요. <불한당>은 1990년대 홍콩 영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출발했고, <킹메이커>는 주제가 먼저 떠올랐어요. 앞서 말했듯 <길복순>은 배우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죠.


요즘 함께 작업하고 싶거나 혹은 관심이 가는 배우는요?

<약한 영웅>의 홍경 배우에게 관심이 가더라고요. 신인인데 보는 내내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느껴졌거든요. <나의 해방일지>의 손석구 배우와도 같이 작업해보고 싶고요.


영화감독으로서 또는 연출자로서 목표하는 바가 있나요?

예전에 유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장편영화를 5개 찍는 것이 목표라고 답했는데, 제가 말했지만 막상 글로 보니 되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더라고요.(웃음)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화계에 대단한 한 획을 긋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현장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일에 파묻혀 사는 편이긴 한 것 같지만요. 정말 운이 좋게도,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과 작업도 해보고 제 영화를 너무 사랑해주는 팬분들도 생겼지만 구태여 원대한 목표를 세우지는 않으려고요. 그저 계속 찾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배우들이나 영화사 관계자, 스태프들이 작업하고픈 연출자, 감독으로요. 그리고 더 이상 저를 아무도 찾지 않을 때,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제쯤 차기작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저는 작품이 끝나면 모든 걸 잊는 편이에요. 그리고 맨땅에 헤딩하듯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죠. 글을 되게 빨리 쓰는 편이어서, 한번 갈피만 잡히면 과정은 빨리 진행되는 편이에요.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집필을 시작하는 게 목표예요.


다뤄보고 싶은 소재나 장르가 있다면요?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길복순>이 현실에서 흔히 접할 법한 장르는 아니잖아요.



HAIR & MAKEUP  김민영  STYLIST  이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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