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여전히 세차게 뛰는 예술가의 심장, 정상화

6월 1일부터 7월 16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갖는 정상화 화백은 올해 91세의 백전노장이지만, 그가 내뿜는 기운은 여전히 고요하면서도 정열적이다.

EDITOR 정송 PHOTOGRAPHER 서승희

정상화  1932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이후 ‘한국현대미술가협회’와 ‘악뛰엘’ 등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일본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1996년부터는 경기도 여주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오늘날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초기에는 물감층의 마티에르를 강조하는 앵포르멜 작업을 선보였으나 1970년대부터 단정한 에너지가 뿜어나오는 화면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과 미국 스미스소니언의 허쉬혼 미술관, 홍콩 M+,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등에 소장되어 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대적인 회고전 <정상화>를 치른 후 2년여 만에 갤러리현대에서 <정상화: 무한한 숨결>전을 개최한 정상화 화백. 그의 작품은 그간 단색화의 일환으로 소개되곤 했다. 하지만 예술가가 직접 만들어낸 화면 속 작은 격자마다 담긴 색은 비록 같아 보인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그 빛깔이 다르다. 정상화 화백은 ‘격자무늬’와 ‘뜯어내고 메우기’라는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했는데, 이는 ‘아방가르드 정신’을 앞세워 다양한 조형적 매체 실험을 수차례 진행한 끝에 비로소 만들어진 작업의 ‘중심’과도 같은 방법론이다. 이번 전시는 화백에 대한 인식을 전복하고, 풍부한 조형 언어를 가지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정상화의 예술 세계’ 전체에 집중한다. 그의 작품에서 표면을 이루는 본질인 흙, 그리고 규칙과 불규칙을 오가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변화를 지닌 표면의 다양성을 백색 작품으로 풀어내고, 이러한 방법론을 정립하기까지 그가 거쳐온 탐구의 시간을 담은 프로타주, 데콜라주, 목판화를 재조명한다. 그중에서도 이번 전시에서 백색 작품을 한데 모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인상적인데, 흰색은 정상화 화백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정 화백이 사용하는 흰색에는 여러 가지 다른 톤이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사랑하는 건 회색에 가까운 흰색이다. 실제로 그는 물감을 쓸 때 조금씩 다른 배합을 사용하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흰색’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미묘하게 다른 빛깔을 낸다. 이를 화면으로 옮겨오기 위해 정 화백은 오랜 시간 구축해온 자신의 방법론을 활용한다. 캔버스 천을 틀에 매고, 고령토를 바르고, 다시 풀어서 주름잡듯이 이쪽저쪽으로 접고, 또다시 펼쳐서 맨다. 그리고 만들어진 작은 격자의 고령토를 하나하나 떼어내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다. 물감은 여러 차례 덧칠한다. 그렇게 흙을 긁어내다 보니 천이 살짝 뚫리기도 하고, 격자마다 다른 색이 발현되기도 한다. “작업을 하다가 천이 조금 뚫어지면 또 그 너머의 세상이 작업 안으로 들어오니, 나의 예술에는 한계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망백의 화백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은 예술로 시작해서 예술로 끝나간다. 불꽃이 살아 있는 눈빛을 지닌 그는 여전히 생동하는 마음을 가진 듯하다.



‘무제’, 종이에 유채, 콜라주, 93×65cm,1987, 이미지 제공: 갤러리현대


오랜만에 개인전을 여십니다. 이번 전시는 화백님께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자리지요. 이렇게 선보이기까지 오랫동안 시간이 필요했던 작품들입니다.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면 느낌이 새로울 거예요. 그저 사람들이 잘 봐주기를 바랄 뿐이죠. 내 나이 아흔이 넘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이라는 게 참 ‘다 됐다, 다 했다’ 했어도 다시 보면 끝이 없는 거라. 지금 순간도 스스로 부족함이 많이 보입니다. 예술가는 ‘완성’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눈 감는 순간에야 비로소 ‘끝’일 수 있는 겁니다. 계속 작품 해야지. 그러라고 이런 자리도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작품은 단색인 듯 보이지만 수많은 격자로 나뉘어 있죠.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일렁이며 에너지를 뿜어서 단순한 평면, 2차원의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회화에서 평면성과 표면은 무척 중요한 요소입니다. 화백님께 평면성이란 무엇인가요?

평면이라는 게 어렵게 생각하면 한이 없어요. 내가 얘기하는 평면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면은 아니죠. 세로로 보이는 평면, 위에서 아래로 볼 때의 평면, 아래에서 위로 올려봤을 때 보이는 평면처럼 우리 시선이 닿는 곳에는 모두 네모반듯한 평면이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 평면에 소속되는 거니까 그 범위가 무한한 거지. 나의 작업은 어디까지나 평면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가 없어요. 작품 안에서 평면을 이렇게 저렇게 뜯어내기도 하고, 메우기도 하니까. 철저하게 평면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또 나는 ‘심장성’ 같은 게 거기 존재한다고 봐요. 심장이 뛰듯이 들어갔다가 나오고, 피가 흐르듯이 생동하는 존재인 셈이죠.


어떻게 보면 눈이 닿는 모든 것과 공간감을 지닌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평면에 담는 것’이 예술일까요? 그래서 예술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평면의 세계는 무한한 표현의 가능성이 내포된 거나 다름없어요. 예술가에게 작업을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할 수가 없는 거죠. 눈으로 그저 볼 수밖에 달리 방법이 있나.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게 실제로 진짜 그러한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질문 자체가 의미심장해지는 거예요. 답을 찾기 위한 여정 속에서 그것을 시각적으로 언어화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 어떻게 해석해 작품으로 옮기느냐 하는 문제는 방법론에 달린 것이고요.


이전부터 “현대미술에서 방법론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씀해오셨습니다.

결국 작가의 세계라고 봐야죠. 작가의 일평생에서 나온 그만의 ‘세계관’ 말이에요. 그 세계관 속에 작가가 내재해 있는 것과 다름없어요. 결국 모두가 그걸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것 아니겠어요. 거듭 얘기하지만, 끝이란 건 있을 수 없어요. ‘예술을 한다’라는 말은 결국 끝없는 것을 탐구한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야지. 그렇지만 결코 끝을 자신이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아흔 살이 넘었는 데도 캔버스 앞에 서면 새로운 것을 생각하게 된다니까요. 그런데 이게 아니다 싶어서 ‘다시’를 외치며 작업하다 보면 결과적으로는 내가 했던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요. 답이 자꾸 그쪽으로 가는 거죠. 작가는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한 예술가가 남기고 있는 작품은 어떻게 읽혀야 할까요?

작품은 결코 정착된 것이 아니에요. 미술의 역사에서 ‘정상화는 정상화’이지만, 결코 정상화가 그렇게 끝은 아니거든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예요. 작품을 보면서 ‘이 사람이 여기까지 왔구나’ 정도로 봐주기를 바라요. 작품을 한 번 대중에게 선보이면, 설명되는 것, 보이는 것 그 이상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게 참 슬픈 거라.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항시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작가는 어떠한 순간에도 작품 세계에 정착하면 안 된다고 봐요. 그럼 정말 그의 작품 세계가 끝이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왜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지, 왜 그것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 막힌 생각의 문이 열리죠. 비로소 그때 그 작가는 살아 있는 것이고, 작업을 하는 것이고, 드디어 개화開花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실천이 늘 고달픈 것이 바로 예술이에요.


예술가는 늘 고달픈 직업이었어요. 젊은 예술가가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중간에 그만두는 젊은 작가들이 왕왕 있죠. 그런데 이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시대의 탓이지. 그들에게도 폭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는 모두에게 다른 것이니 일단은 끈기를 가지고 자신의 것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이미 많은 것을 이루셨지만, 혹시 남은 꿈이 있다면요?

지난 몇 년간 몸이 좀 아파서 붓을 잠깐 놨어요. 이러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딸하고 약속했어요. 이번 봄부터 작품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95세까지는 내가 힘껏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말이에요. 또 <럭셔리>에 이렇게 얘기했으니 내가 꼭 지킬 겁니다. 예술가는 눈 감는 순간까지 예술가로 살아야 해요. 죽어서도 죽으면 안 되는 게 바로 예술가야.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 있는 게 바로 작품인 거죠. 작품이란 게 작가마다 나오는 시기가 있어요. 젊었을 때보다 말년에 활짝 피는 작가가 더 많아요. 나도 그 시기가 이제 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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