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향수鄕愁와 향수香水


                                            
                                           

EDITOR 윤정은


향수鄕愁와 향수香水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맛본 뒤 그 향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특정한 향에 자극을 받아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현상은 소설의 제목을 본떠 ‘프루스트 효과’라고도 부릅니다. 그만큼 강렬하지는 않지만 저 또한 코끝으로 마주하는 몇 가지 추억이 있습니다. 간혹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맡을 때면 어린 시절 지하 방 한쪽에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뜨개질과 바느질을 즐기셨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그 곰팡이 냄새가 좋다고 킁킁대며 뛰어다니던 동생의 모습도 떠오르고요. 프리지어 향기를 맡으면 졸업식장에서 노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웃던 엄마의 고운 얼굴이, 두리안 냄새를 맡으면 오래전 그 특이한 과일을 딸에게 선물하겠다며 가방 전체에 신문지를 채워 오신 아빠의 다정함이 생각납니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자동 버튼 같다고나 할까요. 후각은 뇌로 전달되는 과정이 다른 감각과 다릅니다. 시각, 미각, 촉각, 청각 등의 감각들은 간뇌의 시상을 거쳐 대뇌로 정보를 전달하는 반면, 후각 신경세포는 중간 과정 없이 바로 대뇌의 ‘안와 전두 피질’에 전달됩니다. 이 부위는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와 연결되어 있고요. 특정 냄새를 맡았을 때 본능적으로 기억과 감정이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이지요. 흔히 사람의 마음만큼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각을 통해 타인의 기억과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니, 이처럼 쉽고 효과적인 무기가 또 있을까요? 심지어 우리에겐 원하는 향을 취향에 맞게 제공해줄 ‘향수’라는 조력 아이템이 있습니다. 좋은 향기를 지니고 싶다는 욕심과 더불어, 좋은 향수에 투자하고 싶다는 의지가 솟구칩니다. 이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전하길 바라면서요. 이쯤 되니 향수 시장의 꾸준한 성장이 합리적으로 여겨지네요.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니치 향수’라 불리는 프리미엄 향수 브랜드들이 특히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범한 향이 아닌, 희귀하고 개성 있는 향을 내세워 자신만의 시그너처를 찾고 싶은 이들을 공략합니다. 후배 하나는 르 라보의 ‘떼누아 29’만 수십 병째 사용하는 중입니다. “처음에는 메마른 초록을 연상시키는 흔치 않은 향이 마음에 들었는데, 몇 년간 쓰다 보니 지금은 진짜 내 것처럼 익숙해져서 바꿀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더군요. <럭셔리> 뷰티 에디터 이지형은 같은 브랜드의 ‘어나더 13’을 자신의 시그너처 향수로 꼽으며 얘기합니다. “뿌리는 사람에 따라 향이 다르게 느껴져요. 그래서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향수처럼 여겨지죠.” 니치 향수는 후각만 내세우지 않습니다. 저마다 지닌 독보적 철학과 이미지 덕분에 향수가 아닌 예술품을 소장하는 듯한 만족을 주기도 합니다.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은 향의 세계에 ‘편집’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최고의 조향사들과 협업합니다. 조향사가 곧 아티스트가 되어 향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를 특유의 후각적 밸런스로 실현하죠. 제가 좋아하는 ‘엉컷 젬’은 조향사 모리스 루셀이 자신을 위해 만든 사적인 향수라고 해요. 털보 같은 외모의 조향사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향이지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 이를 되새기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미학적 가치를 얘기할 때면 오르메의 향수가 빠질 수 없지요. 모자가 함께 이끄는 브랜드 배경도 흥미롭지만, 고유의 모양을 지닌 조형적인 캡과 정교한 12각 보틀을 보면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릅니다. 향기와 니치 향수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더 알고 싶으신가요? 이번 2월호에는 ‘향수 특집’을 담았습니다. 향수를 좋아하는 2명의 뷰티 에디터가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13개 니치 향수 브랜드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찬찬히 살펴보며 자신만의 향수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시향을 위해 매장을 방문하신다면, <럭셔리>도 언급해주시길. 잡지 만드는 사람으로서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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