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호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세계, 이기봉

나뭇잎 사이로 자욱한 안개가 가득하고, 연못 위로는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모호하고 몽환적인 풍경 사이를 찬찬히 거닐며 이기봉 작가는 말한다. 흐릿하거나 혼란스러운 것, 그게 바로 ‘삶’이라고.


Deeper than Shadow – Purple’, 2021, Wood, Silicon, Thread,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241×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Photo: 안천호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세계를 무대로 광범위하게 전시를 이어왔다.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리움미술관, 독일 ZKM 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 중이며 2021년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단체전을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


이른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연못가를 산책한 적이 있다.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풀과 나무들이 떠오르는 해와 함께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때, 같은 장소가 불과 몇 분 사이에 그토록 다른 풍경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가 바라보고 인지하는 세상과 실제 세계의 모습은 과연 어느 정도 일치할까? 무엇이 허구고, 어디까지가 실재일까? 혹은 그 모든 것이 환영은 아닐까? 이기봉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그때의 심상이 떠오른다. 물과 안개를 모티프로 모호하고 몽환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아온 작가는 그림 속 장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라 단언했지만, 손을 뻗으면 안개 입자가 잡힐 듯한 섬세한 표현은 경험 속 다양한 기억을 이끌어낸다. 치밀한 장치, 우아한 붓질로 만들어낸 흐릿한 환영 앞에서 삶의 본질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부각되는 듯하다. 이기봉 작가의 전시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 2008년 이후 14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으로, 자연의 순환과 사라짐에 대한 사색을 담은 작품 50여 점을 선보였다. “내가 관심을 갖는 주요 모티프는 물과 안개입니다. 이들은 사물이나 존재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초월적 영역에 다가서게 만들지요. 평상시 드러나지 않던 사물의 다른 측면에서 어떤 정신이나 영혼을 발견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인간과 사물,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와 흐름에 대한 고찰을 아름답고 아스라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이기봉 작가에게 실재와 허구,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랜만의 전시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2016년까지는 학교 강단에 섰고, 이후에는 오롯한 내 시간을 보내며 작업에 매진했어요. 무엇에도 쫓기지 않으며 혼자 차분히 작업을 하고, 마음대로 게으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국제갤러리 전시는 늘 많은 관심을 받지만 오늘만큼 전시장에 사람이 가득한 풍경은 처음 봅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알고 있던 전시장 풍경과 달라 좀 놀랐습니다. 그동안 내가 많이 고립되어 있었구나 싶었어요.(웃음)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관람객들, 색다른 느낌의 눈빛들이 낯설면서도 신선해요. 나는 정지해 있는데 주변은 무척 바쁘게 돌아가는 기분이랄까요. 많은 분이 좋아해주시니 고마운 마음입니다.


전시 제목이 ‘Where You Stand’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세계’라는 뜻입니다. 흔히 이 세계를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을 인식할까요? 나는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그림자, 파편들을 보는 거지요.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는 계속 변하고, 주변 풍경도 달라집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공간의 이동에 관한 이미지를 종합한 것입니다.


물과 안개를 주요 모티프로 작업해왔습니다.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 시절 읽은 책에서 물에 대한 노자와 장자의 이야기를 접했고, 그들의 말이 굉장히 설득력 있다고 느꼈어요. 습기의 세계는 정말 대단합니다. 물, 안개, 비, 눈 같은 형태는 상태변수일 뿐, 정작 본질은 없어요. 현란하게 모습을 바꾸며 우리를 혼돈에 빠트리고, 감정과 기분을 쥐락펴락하죠. 세상의 모든 비밀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연 안개 속에서 삶의 본질이 더 잘 드러난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안개는 우리 감각이나 지각을 혼란시켜 세상의 흐름을 깊이 있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물질로, 내 작품에서 중요한 핵심 포인트가 되었어요. 안개가 자욱할 때, 그 속으로 세상이 잠겨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 역설적이지요. 인생도 시간도 잡아둘 수 없는 것처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안개의 습성입니다.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고, 똑같지 않은 가변성, 전혀 다른 세계가 계속 발생하는 레이어들을 정말 좋아해요.


풍경의 표현이 무척 섬세해서 실제 장소를 모티프로 삼은 듯 보이기도 하는데요. 작품의 영감을 얻는 곳이나 특별히 즐겨 찾는 장소가 있는지요?

없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장소는 이름이 정해져 있고 미스터리라는 개념이 어울리지도 않으니까요. 결국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장소는 내 머릿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듯해요. 때문에 좋아하고 즐겨 찾는 곳은 ‘가상의 장소’입니다. 작품 속 풍경을 보고 골프장 같다는 이들도 종종 있어요.(웃음) 하지만 실재하는 어떤 공간과도 결코 같지 않은 장소입니다. 내 작품 속 풍경만큼은 영원히 현실 세계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해요.



국제갤러리 전시장에서 작품 앞에 선 이기봉 작가.


‘Where You Stand Green-1’,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6×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Photo: 안천호


‘Where You Stand Green-1’,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6×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Photo: 안천호



Cooperation 국제갤러리(735-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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