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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미지의 세계를 안내하는 여행사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장에 특별한 여행사가 들어섰다. 아티스트 로르 프루보가 꾸민 <심층 여행사> 사무실에서 가상과 현실이 뒤얽힌 기묘하고 독창적인 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심층 여행사’ 사무실이 들어선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경.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és


전시장 입구 가까이 설치된 포스터 작품 ‘올라가셨어야죠 You Should Have Gone Up’.
어두운 전시장 벽 한 편에 높이 120cm, 폭 80cm의 작고 네모난 문이 나 있다. 머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서면 낡은 가구와 오래된 컴퓨터, 손때 묻은 각종 집기와 포스터가 빼곡한 사무실이 펼쳐진다.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라는 타이틀을 단 이곳은 프랑스 아티스트 로르 프루보Laure Prouvost가 차린 작은 여행사. 작가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 때마다 세계 곳곳에 여행사를 세우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삼촌의 사업 계획이 실현된 장소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 마이애미와 뉴욕에 이은 네 번째 지점이다.

‘심층’이라는 모호한 목적지, ‘주식회사 Inc.’를 발음대로 적은 ‘Ink.’ 등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곳에서는 현실과 허구가 뒤얽힌다. 얼핏 평범한 여행사 사무실 같지만 아이러니한 장면, 유머러스한 요소, 다채로운 이야기가 구석구석 가득하다. 위아래가 뒤집힌 지도, 콘센트 대신 감자에 꽂혀 있는 전자 기기의 전선, 철자 틀린 문장이 반복해 등장하는 여행 홍보 영상 등으로 인해 익숙한 풍경은 생경한 경험으로 치환된다.



신선한 산딸기와 할머니의 레시피에 따라 진을 첨가한 차를 맛볼 수 있는 사무실 대기 공간.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és
기발한 스토리텔링, 서사의 무한 확장
전시장을 독특하고 기묘한 여행사로 탈바꿈한 로르 프루보는 동시대 아티스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2013년에는 프랑스인 최초로 ‘터너상’을 수상했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프랑스 국가관 전시를 통해 기발한 상상력을 선보이며 큰 명성을 얻었다.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는 비디오와 설치, 퍼포먼스와 조각, 회화까지 장르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메시지를 전한다. 이질적인 이미지와 오브제, 특유의 억양으로 구현된 보이스오버, 문법에서 자유로운 텍스트 등을 활용해 허구와 현실이 뒤얽힌 독자적 서사를 펼친다. 이번 전시에서도 작가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모티프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심층 여행’은 무의식 세계로의 여행인 동시에 개념 미술가였던 할아버지가 감행한 지하 여행을 소환하는 장치다.

터너상 수상작 ‘원티Wantee’(2013)에서 작가는 영국 북부의 작업실부터 아프리카까지 지하 땅굴을 파다 끝내 실종된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선보인 바 있다. 무모한 영웅주의를 실천한 모더니스트이지만 정작 거실은 에로틱한 이미지로 잘 알려진 화가 프라고나르풍으로 꾸민 아이러니도 함께 다뤘는데, 여자 가슴과 엉덩이에 대한 그의 애착은 심층 여행사 곳곳에도 새겨졌다. 더불어 할아버지와 가깝게 교류했다는 현대미술의 선구자 쿠르트 슈비터스가 직접 수리한 테이블, 사라진 남편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자신이 제작한 세라믹 작품으로 모금 활동을 하는 할머니의 동물 조각과 차 도구 등도 사무실을 채운다. 흥미로운 점은 마치 온전히 사실을 기반으로 한 듯한 이 모든 스토리에는 허구와 의도적 설정이 개입돼 있다는 것. 할아버지의 일화로 진보적인 예술가조차 피하지 못한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 구분과 가부장적 시선 등을 들추고, 남편이 실종된 후 비로소 예술적 재능을 꽃피운 할머니를 통해 역사 속에서 남성 예술가에 가려졌던 여성 예술가들을 재조명하는 식이다. 전시를 기획한 안소연 아티스틱 디렉터는 “진보와 퇴행이 뒤섞이고 미래와 과거가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동시대에 대해 그녀의 작업은 수많은 장소와 시간, 의미와 문제를 엮어 지은 기발한 스토리텔링으로 여러 갈래의 우회적인 비판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사무실 책상 한편에 상영 중인 로르 프루보의 첫 장편영화 <방랑자>의 일곱 시퀀스 중 다섯 번째 ‘벙커/통신 시퀀스’. Photo: Sangtae Kim © Laure Prouvost; Fondation d’entreprise Hermés


<심층 여행사>의 주인공 아티스트 로르 푸르보. Photo: Giorgio Benni © Laure Prouvost
무의식의 심연으로 떠나는 여행
이번 전시에서는 ‘심층 여행사’를 포함해 로르 프루보의 작품 총 4점을 감상할 수 있다. 여행사 사무실 책상 한편에는 작가의 첫 장편영화 <방랑자>의 일곱 시퀀스 중 다섯 번째인 ‘벙커/통신 시퀀스’(2012)가 재생 중이다. 언어의 오역이 의미를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험한 작업으로 아티스트 로이 맥베스의 2010년 작 ‘프란츠 카프카의 방랑자’를 기반 삼아 소통의 불완전성을 가시화했다. 사무실에서 이어진 극장에서는 대형 화면 위로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2014)이 상영된다. 작가의 선동적인 보이스오버와 텍스트, 빠르게 지나가는 촉각적 이미지, 극적인 사운드가 한데 어우러지며 강렬한 시각적, 심리적 경험을 통해 ‘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올라가셨어야죠’(2019). 런던 지하철 프로젝트를 통해 선보인 포스터 문구로 경험과 상황에 따라 자유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자재로 여행하며 심연을 건드리고 의식과 감각을 확장시키는 로르 프루보의 기발한 이야기에 빠져들 시간이다. 전시는 6월 5일까지.

디자인하우스 [LUXURY 2022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