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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모티프로 한 '북 아트'의 세계

Art for Book

세상이 디지털 세계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지만 책은 여전히 소장하고 싶은 대상이다. 책을 모티프로 한 ‘북 아트’도 조형미와 친근한 감성으로 아트 애호가의 눈길을 끌고 있다. 책에 대한 저마다의 시선을 담아 메시지를 전하는 아티스트 6명의 작품 세계 탐구!

‘지식’과 ‘기억’을 상징하는 책
유선태
동양과 서양,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이는 유선태 작가. 책, 액자, 거울 등 일상의 소재를 재해석해 입체적으로 표현한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회화로 ‘한국의 르네 마그리트’라고도 불린다. 그의 작품에는 책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림 한구석에 가만히 놓여 있기도 하고 책장을 펼친 채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기도 한다. 거대한 나무를 떠받친 채 ‘섬’처럼 허공에 떠 있기도 한다. 책은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인 ‘말과 글’ 중 글을 의미한다. “책은 대부분 닫힌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관심 없이 지나치기도 하고 골치 아픈 대상으로 취급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일단 책장을 여는 순간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우리에게 희로애락뿐 아니라 지식을 주고 때로는 접었던 ‘날개’를 펼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림과는 또 다른 예술의 세계이자 글로 이루어진 세계이지요.”


‘말과 글 - 신기루’


‘말과 글 - 책 위에서의 명상’

‘책 위에서의 명상’은 책과 나무의 형태를 결합해 책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나무를 자화상처럼 표현한 작품. 과거, 현재, 미래 3개의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말과 글 – 아뜰리에 풍경’은 노란색 벽면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날아다니는 책을 배치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듯하다. ‘아뜰리에 풍경’시리즈 중 초기작으로 노란색을 선택한 이유는 “가장 인공적이고 자연과 배치되는 색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 작가는 앞으로도 책을 주제로 하는 그림이나 오브제 작업을 지속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책 자체가 지니는 조각적인 면과 공간과의 결합, 책과 다른 오브제와의 연계, 글이라는 개념 속 책의 의미 등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해나갈 계획입니다.”

유선태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 파리 국립미술대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국립8대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2015년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한 개인전 <말과 글 – 풍경 속의 풍경>에서는 오랜 기간 완성한 대표작을 한 캔버스에 구성한 ‘말과 글 - 30년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극사실화로 그려낸 책의 재발견
서유라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세계적 베스트셀러 <로미오와 줄리엣>, <티파니에서 아침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안나 카레리나>가 겹치고 포개져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Love–omeo & Juliet’. 작가 서유라는 책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역사, 여성의 삶, 사랑, 영화사, 미술사, 남녀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앤디 워홀, 파블로 피카소 등 미술계 거장들과 관련된 책을 수집해 작업한 ‘명화’ 시리즈, 신문이나 잡지의 인쇄물에 등장하는 유명 모델, 기성 제품, 상표에서 팝Pop적인 요소를 끄집어낸 ‘일상, 광고’ 시리즈 등 책에서 발견한 각기 다른 형태와 내용에 주목했다. 멀리서 보면 사진 같은 극사실적인 그림은 실제로 책을 블록 놀이 하듯 쌓고 펼치고 세우고 뒤집는 것에서 시작된다. 간단한 사진 작업을 거친 후 이것을 유화로 그려낸다. “한 권씩 책을 쌓아 올리는 과정은 매우 더디지만 느리게 호흡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책 더미는 하트나 별, 꽃 모양이 되기도 하지요. 저마다 다른 얼굴과 생각이 담긴 책들 사이로 파편화된 이미지를 심습니다. 도서관에 빽빽하게 꽂힌 ‘책’의 딱딱한 이미지를 지우고 유희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Love - Romeo & Juliet’


‘Art Book - Manet’

실제 있는 책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상상한 책, 슈퍼 히어로, 스포츠 스타 등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삽입해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듯하다. “과거의 시간, 경험의 지층, 기억의 심층에서 퍼 올린 낡은 것들을 현재의 지평에서 종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서적의 형태와 색감이 다양해지고 주제와 연관되는 다른 사물이 등장하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최근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인 ‘악기 케이스’에 음악에 관련된 책을 절단해 빽빽하게 채운 입체 작업 ‘Harmony Book’을 완성하기도 했다. 이를 확장해 앞으로는 설치 작업도 선보일 계획이다.

서유라 한남대학교 회화과, 동 대학 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07년 <책을 쌓다>전을 비롯해 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예술가의 서재>, <책거리 특별전> 등 ‘책’을 소재로 한 다수의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가나아트센터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책의 이면에 주목하다
최은경
최은경은 책을 ‘빚으며’ 인간의 지성에 물음을 던지는 조각가다. 스테인리스, 대리석, 클레이, 세라믹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작은 크기의 작품부터 대형 설치물까지 선보인다. 흙으로 만든 책은 형태와 내용이 뭉개졌고 아예 글자가 없는 것도 있다. 표지에는 ‘거짓Lies’, ‘용감한 선택The Brave Choice’, ‘정의Justice’ 등의 제목을 붙여 사람들에게 ‘지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상원미술관 신혜영 큐레이터는 전시 서문을 통해 “최은경 작가의 작업은 지성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에서 출발해 자연의 본을 따라서 사는 삶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는 것으로 읽힌다”고 밝혔다.


‘Books and Animals’


‘Mother’


‘Hidden’

2000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UC Davis 초대 작가로 두 달 동안 머물면서 그녀는 책의 형태에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 도서관에서 우르르 나오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책으로 내면을 채운 지식인들이 이끄는 세상이 왜 탐욕과 부정으로 가득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세상을 너무 비판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용서Forgiveness’라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서적 앞에 먼 곳을 응시하는 흰 사슴을 세워놓았는데 사랑과 용서를 상징하는 또 다른 단어인 ‘엄마Mother’라는 글자가 사슴 몸에 비친다. 2007년 헤이리 북 뮤지엄 윌리엄 모리스에서는 전을 열었다. 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건인 책과 기둥, 시계가 쓰러진 폐허의 현장을 거대한 설치물로 보여준다. 최은경 작가는 “삶과 사람, 세상에 대한 정직함, 용기에 관한 것이 작업에 큰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그동안 선보인 제 작품들이 도서관 곳곳에 설치되면 좋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세상과 사람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은경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공부한 뒤 크리스털, 점토, 유리 등으로 ‘책을 만드는’ 조각가. 1988년 로리치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뉴욕 파슨스 갤러리, 교토 마로니에 갤러리 등 세계 곳곳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2002년 베네치아 국제조각설치전에 초대받은 첫 한국 대표 작가이기도 하다.




책장은 주인의 내면을 반영한 거울이다
임수식
임수식은 조선 후기 유행했던 책가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책가도’ 시리즈를 10여 년간 선보이고 있는 사진작가다. 원로 사진가 홍순태, 시인 김용택, 소설가 김훈・박범신・안정효 등 문인과 사진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책장을 찍고 한지에 프린트해 찢은 후 조각보처럼 손바느질로 꿰맨 작품. 자신의 책장을 찍은 첫 번째 책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책장이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초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연작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작품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미묘한 뒤틀림이 느껴진다. 책가도의 다시점적인 구도를 담기 위해 책장을 칸마다 다른 각도로 찍은 뒤 포토샵으로 이어 붙였기 때문이다. 작품을 프린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묻혀 찢은 다음 실로 일일이 꿰매는데 여기에는 작가의 소신이 담겨 있다. “책장을 찍은 사진 한 장을 전시하면 작품으로서의 밀도가 떨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 ‘책가도’ 시리즈의 시작입니다. 노동 집약적 작업에는 ‘에너지’가 있다는 확신도 있었지요. 대가들이야 한 획의 붓질만으로도 깊이가 묻어 나오게 할 수 있지만요(웃음).”


‘책가도045’


‘책가도389’

작품 이름에는 주인 이름을 일부러 빼고 대신 번호를 붙인다. ‘책가도 001’부터 시작한 시리즈는 ‘책가도 407’까지 이르렀다. ‘책가도 407’은 그간 촬영한 수많은 이의 책장을 한 칸씩 이어 붙인 것. ‘개인의 초상이 모이면 군중이 되고 사회가 된다’는 생각으로 기존의 ‘책가도’ 시리즈를 확장한 작품이다. “ ‘책가도’는 텍스트를 읽는 작업입니다. 제목을 붙이면 오히려 감상하는 데 편견을 줄 것 같았어요. 제목을 달아놓으면 책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이 책 나도 가지고 있는 책인데?’, ‘누구의 책장일까’ 하면서 읽어나가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자신이 갖고 있는 선입견에 갇혀 책장 주인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임수식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7년부터 ‘책가도’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다. 최근에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개인전 <책가도: 정물과 초상>을 개최했다. 사진, 한지, 손바느질을 접목해 한국의 전통미를 담은 작품으로 해외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많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라이너 쿤체 박물관에도 작품이 소장돼 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책’
황선태
종이 한 장 한 장을 유리로 형상화한 책이 펼쳐져 있다. 검은색 텍스트가 빽빽하게 적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텍스트가 겹겹이 쌓여 있어 정작 읽을 수 없는 검은 ‘덩어리’일 뿐이다. 황선태 작가의 ‘박제된 글자들’(2005)이다. 책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재료는 유리. 가마에서 녹인 유리를 성형해 적당한 형태가 만들어지면 샌딩(고압 모래 분사)을 통해 에칭하거나 유리에 직접 인쇄하는 방식으로 낱장을 만든다. 이후 자외선 유리 접착을 이용해 낱장을 조립해 완성한다. “투명한 유리의 성질을 이용해 책에 담긴 철자들의 덩어리를 시각화했습니다. 책을 형상화한 투명한 유리는 알몸의 텍스트를 드러내며 마치 자신은 의미 없는 껍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동시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듯 무거워 보이는 텍스트 덩어리를 아주 불안하게 감싸고 있지요.” 황 작가는 독일 유학 중 베를린에서 열리는 기획전에 이 작품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책과 관련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물로서의 책’, ‘텍스트’, ‘이해와 해석’, ‘읽다’, ‘글쓰기’ 등 ‘책’ 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키워드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다.


‘얼어붙은 이야기 - 미술사’


‘얼어붙은 이야기’


‘낯선 글자들’

황 작가는 색깔이나 형태를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물을 투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는 유리의 특징을 작업의 중요한 소재로 삼는다. 차갑고 단단한 반면 쉽게 깨지기도 하는 유리의 ‘이중성’에서 책과 비슷한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자신의 세계관에 비추어 개인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잖아요. 시간, 상황, 환경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같은 내용이 다르게 전달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시대를 풍미한 거대 담론도 시간이 지나며 가치가 없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책의 상대적 속성을 유리의 특징과 연결 지었습니다.”

황선태 빛, 유리 등 다양한 재료로 설치, 입체 작업을 하고 있다. 일상의 사물에서 영감을 받는 그에게 책은 사물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는 소재. 최근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빛・시간・공간>을 통해 LG 디스플레이의 휘어지는 OLED를 적용한 신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LED 조명을 삽입해 빛나는 책
강애란
전시장 한가운데 200여 점의 ‘책’이 거대한 육각형 탑 형태의 책장에 진열되어 있다. 아크릴로 만든 책 오브제에 LED 조명을 장착한 ‘라이팅 북Lighting Book’이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는 작품. 30여 년간 책을 소재로 다채로운 작업을 선보여온 작가 강애란이 쌓아 올린 ‘지혜의 타워링’이다. “처음에는 제가 읽었던 책, 좋아하는 아트 북을 라이팅 북으로 만들기 시작하다 점점 주제를 담게 됐어요.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사람들이 주목하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 ‘빛’을 떠올렸습니다.” 1986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 한국에 팽배한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교육제도, 유교 사상, 남존여비에 미친 서적의 영향을 보자기에 꽉 묶은 책으로 표현한 것이 ‘북 아트’의 시작. 캐스팅 방식으로 작품을 구현하는데 “불을 켜면 표면이 누래지거나 깨지는 등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30년쯤 만들다 보니 표면이 예쁘게 됐다”고 말한다. 강 작가에게 책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 즉 가상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책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지식, 감정을 담은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입니다.”


‘The Luminous Peom’


‘The Concern of Book’

12월 28일까지 열린 <덕수궁 야외 프로젝트: 빛・소리・풍경>전에서는 1904년 고종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세운 덕홍전 내 고종 황제의 서재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을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고종 황제가 읽었던 서적, 외교 문서 등에 대한 자료를 라이팅북과 영상으로 재현한 작품.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 고종이 접했을 법한 책까지 선보였다. 나아가 책을 만지면 프로젝션이 펼쳐지거나 클라우드와 연동해 읽고 싶은 도서에 스마트폰을 갖다대기만 하면 짧은 영상을 볼 수 있게끔 하는 인터랙티브 북도 선보이고 있다. “제가 의도한 건 작품을 만져도 보고 자기 서재에 꽂아놓기도 하는 거예요. 외국 작가들은 자신이 쓴 책을 라이팅 북으로 만들어달라고 의뢰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책을 통해 제가 주목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강애란 30여 년간 책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4~5 년 전부터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2016년 아르코 미술관에서 전을 개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나혜석, 윤심덕, 일엽 스님, 최승희, 위안부 할머니 각각의 방을 디지털 북과 함께 꾸며 그녀들의 이야기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디자인하우스 [LUXURY 2018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