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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OF VIEW

식탁 위의 럭셔리, 쌀의 미학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식재료이자 오랫동안 주식을 담당해온 쌀. 품질 좋은 쌀로 잘 지은 밥 한 공기는 럭셔리한 식사의 시작과 끝이다. 최고의 식탁을 완성하는 쌀의 맛과 매력에 빠져 더 나은 식문화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미식의 최전선에 선 쌀
“밥을 주식으로 갖가지 반찬과 함께 차려내는 반상飯床은 우리나라 고유의 상차림입니다. 밥과 국, 김치, 반찬으로 이뤄진 가장 한국적인 조합일 뿐만 아니라 젓가락을 사용하는 식문화를 고스란히 드러내지요. 한식 파인다이닝의 최대 화두 역시 반상의 중심인 ‘밥’입니다. 2003년 가온을 출범할 당시에도 주방에 가장 처음 들인 기계가 도정기예요. 갓 도정한 쌀은 적당한 점성과 수분, 향기가 오랫동안 입안에 남아 배가 불러도 한 술 더 뜨고 싶은 욕심이 나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날 도정한 쌀에 제철 식재료를 넣고 지은 솥밥은 가온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찹쌀과 멥쌀의 중간 정도 질감을 지닌 김포 금쌀을 쓰거나 금쌀의 작황이 좋지 않은 해엔 강화 섬쌀로 밥을 짓죠. 불린 쌀을 기준으로 솥에 200g의 쌀만 넣고 조리해야 밥맛이 가장 좋습니다. 재료에 따라 수분량이 달라지지만 180g에서 210g 사이를 오가죠. 이때 맹물이 아닌 육수를 써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등심구이 솥밥의 밥물은 소 사골과 사태를 각가 우려 섞은 뒤 콩소메처럼 맑게 뽑고, 시래기 솥밥은 시래기를 삶은 물에 다시마를 넣고 우려내 밥물을 만듭니다. 밥을 짓기 시작해 연기가 나면 불을 끄고 10분 동안 뜸을 들인 후 약한 불에 4분간 가열해 밥이 고르게 익게끔 합니다. 우리 밥상의 주인공인 밥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까 고민한 결과 마치 과학 실험을 하듯 밥을 짓게 된 셈이죠.”


김병진 광주요 그룹 외식사업부 ‘가온 소사이어티’에서 운영 중인 한식당 가온의 총괄 셰프. 한림대학교 전통조리과를 졸업한 후 2003년 가온 셰프로 입사했다. 그는 현재의 가온을 만든 셰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재료 본연의 힘’을 바탕으로 풀어낸 한식으로 3년 연속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서 별 3개를 얻어냈다.

다양한 쌀을 맛보고 경험하는 즐거움
“‘동네정미소’는 다양한 품종의 쌀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쌀집’이자 갓 도정한 지역 농부의 쌀로 지은 밥을 제공하는 ‘밥집’입니다. 쌀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식재료가 드문데 관심은 그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이 늘 아쉬웠어요. 직접 먹어보는 것이야말로 쌀을 알아가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전시, 판매뿐 아니라 식사도 제공하는 공간으로 꾸렸습니다. 주로 농촌의 작은 연합과 협동 조직, 마을 단위와 협업해 단맛과 찰기가 특징인 추청과 삼광, 쌀알이 크고 씹는 식감이 좋은 신동진·새누리·오대, 아미노산이 함유된 기능성 쌀 하이아미 등 쉽게 접하기 힘든 독특하고 개성 있는 지역 농부의 쌀을 소개하고 있어요. 400g 분량으로 소포장한 쌀을 여러가지 맛본 후 취향에 맞는 것은 농촌과 연계해 정기 배송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1년 동안 나와 우리 가족의 주식이 될 쌀을 누가 어디서 재배하는지 알고, 종종 들러 벼가 자라는 모습을 둘러볼 수도 있다면 삶이 한결 더 풍요롭지 않을까요? 산지와 로스팅의 영향을 받는 커피처럼 쌀도 어떤 품종을 누가 어떻게 재배했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혼합이 아닌 단일 품종, 도정 일자가 가장 최근인 것, 쌀알의 모양이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고 온전한 것이 맛있어요. 지금까지의 밥이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쌀을 통해 다양한 재미,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동네정미소를 통해 쌀 품종에 따른 세세한 특징을 알아가는 즐거움과 경험을 알리고 싶은 이유입니다.”


황의충 도시 농업을 10년 이상 해온 농부이자 농가와 도시를 잇는 직거래장, 교육용 생태 텃밭 등을 운영하는 서울 도시농업시민협의회 운영위원. ‘녹색친구들’의 김동식 대표와 의기투합해 2017년 12월 동네정미소를 열었다. 다양한 쌀 품종을 친근하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관련 강의를 펼치며 쌀의 다양한 매력을 전파하고 있다.

드론을 사용해 경작한 ‘명품’ 쌀
“1991년 6월 일산 신도시 개발이 한창일 때 대화동 가와지 마을에서 한반도 최초의 재배 볍씨인 ‘가와지’가 발견됐습니다. 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이뤄졌음을 알리는 귀중한 유물이죠. 일산은 5000년의 농업 역사를 간직한 가와지의 고향이지만 고등학교 재학 당시 ‘농사꾼의 자식’은 전교를 통틀어 저 혼자뿐이었어요. 3대째 이어온 가업이기도 하지만 쌀을 샤넬이나 루이 비통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품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오기로 2009년 농사에 뜻을 굳혔죠. 밥이 곧 보약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해 작년에 출시한 쌀이 ‘게르마늄 실크미’입니다. 고시히카리 품종에 게르마늄 비료를 시비한 후 유효 성분을 쏙쏙 먹고 자란 낟알만 털어낸 ‘명품’ 쌀이죠. 일반적으로 밑거름, 가지거름, 이삭거름 등 세 번에 걸쳐 비료를 뿌리지만 게르마늄 실크미는 10회 이상 비료를 시비합니다. 1년 중 가장 무더운 시기에 기계를 짊어지고 본답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시비 작업은 벼농사에서 가장 큰 난관이죠. 하지만 작년부터 농업용 드론을 도입해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농업도 시대에 발 맞추어 변하고 있어요. 첨단 도정 시설은 물론 타작 후 벼를 건조시킬 때도 저온에서 물레바퀴 돌리듯 천천히 순환시켜 미질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등 가공법 또한 첨단화되어가고 있죠. 지금이야말로 저 같은 젊은 농부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새내기 농부의 발 빠른 정보력으로 늘 접하는 주식인 쌀에 프리미엄 이미지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이재광 3대째 경기도 일산에서 쌀농사를 지으며 이어온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2009년 농업에 뛰어들었고, 현재 청년들로 구성한 일산쌀농업회사법인을 이끌고 있다. 쌀 브랜드 ‘일산 프리미엄 쌀눈쌀’을 론칭했으며 적진주를 기름에 튀기지 않고 열풍으로 구운 ‘일산 로스팅 현미칩’ 등을 출시하며 쌀 가공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메뉴와 취향에 따라 골라 먹는 신선한 쌀
“‘도정공장’은 신선하고 건강한 쌀을 당일 도정해 당일 배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밥맛이 좋으려면 쌀의 품종과 품질 못지않게 도정이 중요하거든요. 쌀의 신선도는 ‘수분’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공기와 접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보통 도정 후 일주일이 지나면 산화가 시작되고 보름이 지나면 본연의 맛이 사라집니다. 도정할 때는 깨진 쌀이나 가루가 거의 없도록, 검게 탄 쌀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 써요. 지난해 도정공장을 오픈하면서 여러 도정기를 테스트한 후 국내에 한 대뿐인 일본 정미기를 택했는데, 색을 구별할 수 있어 검은 쌀을 골라내고 동일한 크기의 쌀알을 선별해 균일한 밥맛을 보장합니다. 현재 저희가 소개하는 쌀은 진상미, 하이아미, 미소미 총 3가지입니다. 올가을에는 영호진미, 삼광, 고시히카리 등 6~7가지 품종을 더 늘릴 계획이고요. 개인의 입맛, 음식 메뉴 등에 ‘맞는 쌀’을 잘 골라 먹자는 게 우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에요. 찰기가 적은 것부터 강한 것까지, 단맛이 없는 것부터 많은 것까지 맛이나 식감이 서로 겹치지 않는 범주에서 여러 쌀을 구비해 상황별, 취향별로 만족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려 합니다. 최근에는 곤드레, 버섯 등을 동결건조해 쌀과 함께 포장한 ‘간편솥밥’을 개발하고 있어요. 깨끗하고 품질 좋은 쌀을 직접 재배하고 수확해 소개하고 싶어 올해는 이천에 파종도 했고요. 앞으로도 오로지 쌀 자체에 집중해 숨은 매력을 찾아내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려합니다.”


신민욱(왼쪽)·이용인(오른쪽) 이천에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동갑내기.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패션 사업을 하다 우연히 맛본 햅쌀 맛에 반해 쌀 판매를 구상한 이용인과 이천에서 7년 동안 농기계 관련 일을 하며 쌀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온 신민욱이 의기투합했다. 당일 도정, 당일 배송을 원칙으로 품질 좋은 쌀을 소량 포장해 선보이고 있다.

쌀 유통의 트렌드를 이끄는 밥소믈리에
“쌀을 비롯한 곡물의 품종과 특징, 영양 요소 등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맛과 영양을 두루 갖춘 밥 레시피를 연구하고 소개하는 ‘밥소믈리에’로 활동 중입니다. 밥소믈리에는 일본취반협회가 주관하는 시험을 거쳐 주어지는 자격으로, 쌀과 밥에 특화된 전문가라 할 수 있어요. 쌀은 한국인의 밥상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지금껏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품종과 특징, 맛있게 먹는 방법에 대해 조금만 신경 쓰면 매일 마주하는 식탁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요. 지난해 말 현대백화점이 오픈한 ‘현대쌀집’은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기획한 프리미엄 쌀 전문 매장입니다. ‘한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먹자’는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쌀의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문을 열었지요. 매장 기획과 상품 개발 단계부터 참여해 영호진미, 골든퀸3호 등 20여 종의 입점 품종을 선정하고 일반 쌀에 잡곡을 배합한 테마 상품 레시피를 만들었어요. 1~2인 가구도 그때그때 신선한 쌀을 맛볼 수 있도록 350g 소포장 상품을 제작했고,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거나 당뇨·혈압 등 성인병 개선에 효과가 있는 성분을 함유한 곡물을 배합해 한 끼 식사로 온 가족의 건강을 챙길 수 있게 고려했어요. 건강하고 좋은 쌀을 찾아 소비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산지도 함께 발전할 수 있습니다. 쌀이 있어도 판로가 없다면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해봐야 의미 없을 테니까요. 현대쌀집은 쌀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고 문화와 트렌드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박재현 현대쌀집을 대표하는 밥소믈리에. 20여 년간 RPC 미곡처리장에서 영업을 담당하며 수많은 종류의 쌀을 접했고, 품종의 중요성을 느꼈다. 10여 년 전 롯데백화점에 쌀을 유통하면서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밥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했다. 2012년 대구에 국내 최초의 곡물 전문 숍 ‘미미정미소’를 오픈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우리 밥상의 진정한 주인공, 토종벼
“한반도의 벼농사는 5000년 역사를 자랑합니다. 과거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토종벼 가짓수는 1451개에 달했죠. 개량종과 달리 늠름하니 키가 크고 금빛 까락이 무성한 토종벼는 제각기 자라난 땅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까락이 붉어 수확이 가까워지면 논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는 화도는 전라남도의 붉은 벌판에서 자라났고, 토종벼 중에서 가장 큰 키를 자랑하는 북흑조는 이삭이 검은빛을 띠죠. 기계를 동원하고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현대의 석유 농법과는 정반대로 토종벼는 철저히 자연 농법에 따라 재배됐습니다. 밥상의 부산물을 모아 거름으로 사용하고 모판을 일일이 떼어 손으로 모내기했기 때문에 낟알 하나하나 건강한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야말로 ‘최고의 쌀’이었죠. 쌀 한 톨에 고유의 맛과 멋이 담긴 만큼 쌀은 곧 이 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토종벼를 되살리는 것은 쌀의 역사를 찾고 맛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되찾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보농장’에서는 한 해 120여종의 토종벼를 재배합니다. 9월이면 제각기 생김새가 다른 벼들이 익어 들판을 다채롭게 물들이죠. 낟알이 거칠지만 씹을수록 찰기가 강해지는 버들벼로는 리소토를 만들어 먹고, 요리사 나카가와 히데코中川秀子의 말처럼 식을수록 단맛이 올라오는 화도는 입맛이 없을 때 찬물에 말아 먹으면 그만입니다. 우리 쌀로 차린 한 상보다 근사한 식탁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근이 2011년 10m2 남짓한 논에 토종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후 제각기 다른 맛과 멋을 지니며 자라는 토종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연구를 시작했다. 현재 120여 종의 토종벼를 재배하는 우보농장을 운영 중이며 ‘전국토종벼농부들’ 대표도 맡고 있다.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린 <먹는게 예술이다, 쌀>전 등에 참여했다.

디자인하우스 [LUXURY 201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