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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된 한글

소리를 문자로 형상화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디자이너’로 손꼽힌다. 점·선·원에 기반한 기초 글자 8개로 28개 문자를 자유자재로 조합하는 원리는 지금의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되고 있다. 10월, 한글날을 맞이해 한글의 창제 원리와 조형적 아름다움을 특유의 작업 방식으로 해석한 작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현대적 미감으로 새롭게 재탄생한 한글의 색다른 매력 속으로.

도시의 소음을 한글로 채집하다



정진열, ‘도시의 소음들: L.A.’ 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공연과 전시 아이덴티티 작업으로 유명한 디자인 스튜디오 TEXT의 정진열 대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2주간 머물며 귓가를 스치는 다양한 소리를 수집했다. 해변에서 들리는 인공적인 합성음과 경찰차·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 쇼핑 거리에 공존하는 다양한 언어 등을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표기했다. 익히 알려진 의성어가 아닌, 들리는 소리 자체를 한글로 치환해 자유자재로 표기한 것이 특징. 거대한 스크린 위에서 소리 나는 대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수많은 글자는 한글의 폭넓은 표현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표음문자로서의 한글은 우리가 인지하는 소리들을 글자 체계로 풀어내는 데 매우 뛰어난 강점을 지니고 있다”고 언급하며 “표준화된 의성어가 아닌 개인의 소리 관찰력에 의존해 전혀 다른 형태의 표기 방식으로 한글의 잠재력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입체적인 자음과 모음



송봉규, ‘한글 블록’ 산업디자인을 기반으로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전략 컨설팅을 진행하는 BKID와 가구를 기반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매터앤매터, 플라스틱 모듈형 리빙 제품 브랜드 APOP, 한국형 주물 리빙 브랜드 MM 등을 이끌고 있는 송봉규 디자이너의 작품. 재료의 물성을 살리면서 실용성을 극대화한 디자인이 특기인 그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입체화해 모듈 형태로 활용할 수 있는 블록을 제작했다. 한글이 만들어 진 구성 원리를 응용해 각 블록의 소재와 형태를 달리하고, 디지털 3D 툴의 기본 방식인 압출, 회전, 레일 등의 원리를 적용해 평면 글자를 입체적 도형으로 변환했다. 색과 형태가 다채로운 각 블록을 조합하거나 분리하면 전혀 새로운 글자를 구성할 수 있어 흥미롭다. 현대에는 사라진 ‘ㆁ(옛이응)’, ‘ㆆ(여린히읗)’ 등을 포함한 것이 특징이다.


‘ㄱ’과 ‘ㅋ’을 잇는 소리



석재원, ‘한글 포르타멘토’ 비비드한 형광 컬러가 눈길을 사로잡는 석재원 디자이너의 ‘한글 포르타멘토’는 한 음에서 다음 음으로 옮겨갈 때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음을 거쳐 목적음에 이르는 연주법 ‘포르타멘토’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5가지 기본 형태를 바탕으로 획을 하나씩 더하며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는 한글 자음의 구조를 포르타멘토에 접목해 ‘ㄱ’에서 ‘ㅋ’ 으로 넘어가는 소리의 과정을 촘촘한 단면으로 표현했다. 기하학적인 입체도형이나 원기둥을 연상하게 하는 캔버스 속 이미지는 미세하게 변화하는 자음의 형태를 그린 결과다. 석재원 디자이너는 “‘ㄱ’ 과 ‘ㅋ’ 사이에도 우주만큼 넓은 소리의 진폭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작업”이라고 설명하며 “한글 자소가 유연하게 팽창하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내는 가능성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혀의 모양을 추상화한 조형



장성, ‘모비/혀 ㄱ ㄴ ㄹ’ 산업과 아트의 경계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설치미술 작가 장성의 작품. ‘모비MOBI’라는 탈착 가능한 작은 폴리프로필렌 모듈을 후좌우로 무수히 연결해 특정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가는 한글의 창제 원리이자 발음을 만드는 기관인 ‘혀’에 주목해 3가지 설치 작품을 완성했다. 빨강, 노랑, 주황의 조형물은 ‘ㄱ, ㄴ, ㄹ’의 소리를 낼때 혀의 모양을 추상화한 결과물. 작가는 “한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고민하다 혀의 심벌을 차용하는 방법을 택했다”며 “한글은 조형미나 효율성도 훌륭하지만 인류애를 기반으로 고안한 유일한 글자 체계라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다. 이런 한글을 우리 몸과 동일선상에서 받아들이고 생각해볼 수 있길 바라는 의도로 작업했다”고 밝혔다.


점, 선, 원으로 만든 장식



하지훈, ‘장석장’ 한국의 전통 요소를 모던하고 우아하게 해석한 아트 퍼니처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 전통 꽃문양으로 레이저 커팅한 알루미늄 상판을 소반 위에 접목하거나, 나주 소반에서 영감을 얻은 카본 재질의 의자를 제작하는 등의 작업을 이어왔다. ‘장석장’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 형태를 품고 있는 장석 고유의 형태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전통 목가구의 장식으로 쓰였던 ‘감잡이’를 3D 프린터로 구현해 디자인 요소로 활용했다. 한글이 점, 선, 원으로 이루어지는 조합 문자라는 점에 착안해 제작한 ‘ㄱ’, ‘ㅅ’, ‘ㅗ’, ‘ㅏ’ 등의 형태를 표면에 부착해 가구를 보호하고 구조를 견고하게 하는 장석 고유의 기능을 한글의 조형미로 재해석했다.


한글과 건축의 만남



네임리스, ‘선들 사이’ “한글은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은 최소의 글자로부터 시작되며, 최대의 소통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기본 글자 8개로 출발해 현대 한글 표기에서 1만1172자의 조합이 가능한 확장성을 지닌 한글의 가치다. 우리는 이러한 한글의 속성을 문자의 공간화를 통해 구현하려고 한다.” 올해 4월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소리×글자: 한글디자인>에서 한글을 건축적으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인 건축사무소 네임리스 나은중·유소래 소장의 설명이다. 한글의 다양하고 무한한 소통 가능성에 주목한 이들은 기본 글자인 5개 자음과 3개 모음을 대형 설치물로 제작해 오브제와 설치 작품, 건축물의 경계를 아우르는 작품을 선보였다. 구조물들은 사이사이 각기 다른 여백과 공간을 만들며 한글이 지닌 근본적인 가치를 암시한다.


파장을 일으키는 글자





왕현민, ‘파장’ 가늘고 곧은 나뭇조각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부드러운 곡선 형태를 구현한 아트 퍼니처를 선보여온 왕현민 작가. 한글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 그는 시각뿐아니라 청각적으로도 글자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을 구 상했다. ‘파장’은 한글이 소리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파장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문자를 입체화하고 선으로 잘게 나눠 청각을 자극하는 듯한 착각을 유도한다. “한글은 소리글자로, 시각적으로 간결할 뿐 아니라 소리의 체계도 간소하고 과학적이다. ‘ㄱ’이라는 글자를 보면 짧은 순간 ‘기역’이라는 발음이 연상되고, ‘기역’을 내뱉는 순간 글자는 소리로 전환돼 파장으로 바뀐다. 한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서 파장의 이미지를 더해 귀로도 들리는 듯한 느낌을 강조했다.”


율동하는 한글



빠키, ‘문자를 만들어 내는 움직임’ “사람들이 공기를 통해 소리를 내며 소통하는 것처럼, 허공 위에 글자를 그리는 장치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움직이는 기계에서 소리가 함께 나오면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아 사운드를 더했다.” 빠키 작가의 말이다. ‘문자를 만들어 내는 움직임’은 한글을 쓰는 동작을 기계로 형상화한 설치 작품으로, 알록달록한 색을 입은 기계가 ‘ㄴ’, ‘ㅇ’, ‘ㅁ’을 반복해서 그린다. 기계가 작동할 때마다 ‘딱, 쿵, 쨍’ 등 강약이 조절된 탬버린 소리가 함께 울리며 작품에 생동감를 더한다. 각종 전시와 브랜드 컬래버레이션 작업 등을 통해 재기 발랄한 설치 작업을 선보여온 설치미술 작가 빠키 특유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 군데군데 다양한 색을 입혀 기계 사이에 숨겨둔 ‘ㄱ’부터 ‘ㅎ’ 까지 한글 자음 전체를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평면 속에 구현한 입체적 글자







채병록, ‘톱’ 역동적이고 화려한 동양적 그래픽 작업으로 잘 알려진 채병록 디자이너는 입체적인 문자에 대한 오랜 관심을 ‘톱’이라는 글자로 풀어냈다. “ <훈민정음-용자례>에서 톱은 톱질할 거(鋸)가 아닌 클 거(鉅), 강할 거(鉅), 강철 거(鉅)의 의미로 쓰여 있다. 이런 의미를 모두 아우르는 톱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구성했고, 만물의 요소가 분해되고 결합하며 쌓이는 과정을 한글 원리와 비교해 표현했다.” 의사소통을 위한 행위로서의 문자, 한글의 조합, 글자가 형성되는 과정 등을 함축한 작업은 평면적이면서 입체적이고,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이다. 채병록 디자이너는 “한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길 바랐다”고 밝혔다.

디자인하우스 [LUXURY 2018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