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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법도, 형태도, 소재도 다른 현대적 달항아리

달항아리의 새로운 미감

조선 후기에 처음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한국 미술을 통틀어 그 존재감과 생명력이 가장 강한 물건이라 할 만하다. 이 든든한 형태와 기운의 백자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현대적 미감의 작품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풍성한 한 해를 기원하는 새해 벽두, 산뜻하면서도 넉넉한 기운을 주는 ‘모던 달항아리’를 한데 모았다.


조선시대 달항아리, 보물 제1437호
눈처럼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고 해서 ‘달항아리’라 이름 붙은 이 백자의 미학은 ‘불완전함’에 있다. 크기가 커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이기 때문에 컴퍼스로 휙 그린 원과 비교하면 아이가 그린 것처럼 엉성해 보인다. 구연부에서 어깨, 몸통을 지나 굽으로 이어지는 곡선도 똑 떨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보기에 따라 ‘흠’이 될 수도 있지만 세상의 인식과 평가는 반대. 자연스럽고 넉넉한 한국적 미감의 원형이라고까지 언급하며 찬사를 보내는 이가 많다. <럭셔리>에서 만난 수많은 건축가, 예술가, 사상가 중에는 ‘한국 최고의 럭셔리’로 달항아리를 꼽은 이가 수두룩하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 기 소르망은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잡념이 모두 사라진다. 그저 몰입해서 보게 된다”고 했고,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넉넉한 미의 세계”라 평했다. 최근 용산에 들어선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달항아리를 모티프로 설계한 것이다.

이 독창적 형태와 기운의 항아리는 현시대 아티스트에게도 깊은 영감을 준다. “달항아리에서는 한마디로 ‘고수의 여유’가 느껴진다. 몸체가 워낙커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지만 오랜 경력의 도예가라면 충분히 똑바로, 제대로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형화된 구석이 없다. 기량이 절정에 이른 이가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만든 느낌이랄까.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놀랍고 존경스럽다.” 도예 브랜드 ‘해인요’를 통해 다기부터 찬합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김상인 도예가의 말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고 김환기 화백 역시 달항아리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 뜰에는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몸이 둥글고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칠야삼경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동한다. 싸늘한 사기로되 따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 이광표 문화유산학 박사는 한 칼럼을 통해 “둥글고 커다란 백자를 달항아리라 명명한 사람이 다름 아닌 화가 김환기 화백이었다”고 밝혔다. 이 크고, 환하고, 매혹적인 백자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미감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가는 셀 수 없이 많다. 부조, 사진, 회화 등 장르도 다채롭다. 파격적 기법을 동원해 놀라움과 짜릿함을 주는 작품도 자주 눈에 띈다. 그중 실험성과 작품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간추렸다.


천우선 작가
철선으로 만든 우아함의 세계





금속공예가인 천 작가의 작품은 파격적이다. 철선과 구리선으로 달항아리를 엮는데 굽과 주둥이를 연결하는 4개의 중심선을 고정한 후 하나씩 빈 공간을 메워간다. 수십 개의 철선으로 이루어진 금속 면 여러 개를 조각보처럼 이어 붙여 완성한다. 용접 자국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인상적인데 맞붙은 재료 사이로 물처럼 흘러들어가며 깨끗하게 접합되는 ‘은땜’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건축적 구조와 골격을 갖춘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철선의 틈새로 안쪽이 들여다보이고, 안과 밖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는데 단순하면서도 풍만한 느낌을 주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달항아리 형태가 나오더라. 이 아름다운 백자의 핵심은 ‘고요한 생동감’이라 생각해 그런 느낌과 기운이 묻어나도록 특히 신경을 쓴다.” 최근 스페이스 두루에서 개인전을 연 천 작가의 말이다. ‘필라델피아 뮤지엄 오브 아트Philadelphia Museum of Art’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는데 필라델피아 박물관 측이 그의 금속 도자기 2점을 영구 소장해 화제가 됐다.


배세진 작가
건축적 구조와 미감의 작품





배세진 작가는 동시대 주목받는 젊은 도예가 중 한 명이다. ‘공예트렌드 페어’를 포함해 다양한 전시 이벤트에 참가하고, 개인전과 인스타그램(@bae_sejin)을 통해 작품을 알리면서 주로 현대 공예품을 선보이는 그는 뉴욕과 파리, 제네바의 갤러리에서도 꾸준히 러브 콜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건축적 형태와 미감으로 아름답다. 흙으로 만든 프레임을 따라 수백에서 수천 개의 도자 ‘편片’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작업. 달항아리 작품에는 저마다 일련번호를 새긴 약 3000~4000개의 편이 들어간다. 배 작가는 “번호가 적힌 조각 하나하나를 마음 수행하듯 붙여가다 보면 시간이 빙빙 순환하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작품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로 느껴진다”며 “어느 날은 시간이 무디게 흘러가지만 또 어떤 날은 아침부터 집중이 잘돼 금방 땅거미가 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배 작가는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으며 시간의 지속과 순환, 반복을 키워드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김보영 작가
천연 염색한 한지로 구현한 ‘달’





쪽, 홍화, 오리나무 등으로 천연 염색한 한지를 적당한 크기로 조각조각 찢어 한 장 한 장 캔버스에 이어 붙여 달항아리 형태로 완성한 작품. 천연염색과 한지, 달항아리라는 한국 미술 요소가 하나의 덩어리로 어우러지면서 깊고 묵직한 오라를 발산한다. 동덕여대와 동대학원에서 회화와 동양화를 전공한 김보영 작가는 몇 년째 이 작업에 천착하고 있다. 김 작가는 “항아리의 둥그스름한 곡선과 그 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선은 자연에 감사하고 순응하며 살아온 한국인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내게 달항아리의 선은 사람이 아닌 자연이 만든 것처럼 보인다”고 밝혔다. 기법과 스타일이 농익으면서 최근에는 빨간색으로 염색한 한지만 사용하는 등 강렬한 기운의 작품도 선보인다. 크림색 표면에 소나무를 형상화하는 등 무늬도 다채롭다. 일일이 찢은 한지의 올과 결이 드러나면서 ‘손맛’이 한층 도드라진다. “실제 달항아리와 비슷한 크기의 작품도 있지만 훨씬 크게 만든 것도 많은데 이런 에디션은 그 기백과 웅장함이 남다르다. 작가가 구현하고 싶은 것은 결국 ‘한국의 미’라 할 수 있다.” 2년 연속 김작가의 개인전을 선보인 갤러리엘르 양자윤 큐레이터의 말이다.


사진가 남종현
환영 속 물건처럼 신비로운



현대자동차를 포함해 여러 브랜드의 광고사진을 찍던 사진가 남종현은 어느 순간 ‘나만의 작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심 끝에 달항아리를 소재로 삼기 시작한다. 중년의 사진가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이 커다랗고 깨끗한 항아리는 비정형이라 앞뒤, 좌우의 모습이 다 다른데 그 독특한 미학이 무척 매력적으로 와닿았다”고 말한다. 이 사진 작업에 담은 주인공은 도예가 김상인의 작품. 순백의 넉넉함, 소박한 생김새에서 묻어나는 따뜻함이 아련하게 전해진다. 조선 시대 달항아리를 찍은 시리즈는 오래된 작품 특유의 아스라한 정취가 인상적이다. 사진 작업인 만큼 인화지가 중요한데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한지. 종이의 특성상 피사체가 흐릿하게 번지면서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수십 년간 제품 사진을 찍으며 조명을 다뤄온 그는 달항아리의 기품과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빛의 세기와 방향을 잡고 셔터를 누르는데 그 결과물은 마치 환영 속 기물인 것처럼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한지와 백자의 색이 은은하게 어우러지는 모습도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침묵하는 사물들이 내 사진을 통해 한지에 스미고 그 미감이 보는 이의 마음에 아름답게 번지면 좋겠다.”


강준영 작가
세상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백자







앤디 워홀과 장미셸 바스키아, 힙합과 마이클 잭슨을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은 위트가 넘친다. 분명 달항아리지만 표면에 O, X, ?, ☆ 같은 각종 기호를 그려 넣고, ‘I’ll Pray for You’처럼 심경을 대변하는 문장도 함께 적어 패션쇼 소품으로 활용해도 될 만큼 화려하고 감각적인 모습이다. 홍익대학교에서 도예와 유리를, 동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 작가는 래퍼처럼 자유분방한 작업 세계를 보여준다. 중학교 때 호주로 유학을 떠나면서부터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린 그는 한국에 온 뒤로 ‘도자기에 나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려보자!’고 마음먹었고 이후 느끼고 생각한 대로 도자 표면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가장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역시 달항아리 작품. 큼지막한 몸통에 온갖 기호와 글, 무늬가 더해져 하나하나 찬찬 히 살피며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이 남다른 기품의 백자는 작가에게 그 자체로 커다란 캔버스다. “초벌 상태에서 세라믹 펜슬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입혀 굽는 것이 기본 공정인데 작품에 따라 이 과정을 서너 차례 반복하며 디테일을 만들어나간다. 금가루를 입힌 골드 러스터 유약을 이용해 화려한 색을 입힐 때도 많다.” 세상에 없던 달항아리로 유명세를 얻은 작가는 싱가포르 휴 갤러리, 런던 사치 갤러리 등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샤넬을 포함해 여러 럭셔리 브랜드와도 협업하며 공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회화, 드로잉, 도자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데 최근에는 해외 미술 전문 사이트 아트넷(artnet.com) 등에 소개되며 유럽에서도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최정유 작가
푸근하고 정겨운 ‘삼베 베이스’



상품 개발을 포함해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최정유 작가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바구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살다 온 이모가 사다 준 바구니를 계기로 다양한 형태와 미감의 바스켓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담양으로, 네팔로 수집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볏과 식물부터 면실까지 바구니를 만드는 다양한 재료에 눈을 뜨면서 작업은 재료 자체의 물성과 매력을 살리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삼베 조각을 잇고 꿰매 백자 모양으로 만든 ‘삼베 베이스Hemp Vase’ 는 그렇게 탄생한 작품. 천으로 만든 투박한 생김새의 조각이 색다른 묘미를 전한다. 연작 시리즈는 형태가 홀쭉한 것에서 시작해 점차 풍만해지다가 결국 달항아리로 끝난다. “삼베 베이스는 ‘뮤지엄에서 집까지From Museum to Home’ 컬렉션의 결과물 중 하나다.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박물관을 찾았는데 백자처럼 따뜻한 소재와 형태에 눈길이 닿았다. 자기에 유약을 입히듯 삼베에 먹으로 농담을 입힌 것이 특징으로 어느 공간에서나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오브제를 선보이고 싶었다.”


김연옥 작가
‘겹겹이’ 아름다운 도자기



최근 역삼동 GS빌딩의 로비에는 김연옥 작가의 작품 수십 점이 걸렸다. 다양한 형태와 모양의 달항아리를 화폭에 옮긴 회화들…. 캔버스 모양에 맞춰 세로로 자른 천 조각을 일정한 간격으로 붙인 후 그 위에 순백의 백자를 그려 개성과 깊이가 묻어난다. 천이 반복해서 겹을 이루어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옵티컬아트처럼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도 인상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을 포함해 여러 국공립 미술 기관이 선택한 김 작가에게 달항아리는 오래전부터 익숙하고 친근한 물건이다. 아버지가 여주에서 도자기 공장을 해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를 도와 표면에 유약을 바르고 채색하는 작업을 7년여 동안 반복했다. 김 작가는 “단순한 선과 형태로도 우아한 기품을 발산하는 것이 달항아리의 매력”이라고 밝혔다. 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항아리는 그녀에게 영감의 대상이자 더욱 몰입하고 싶은 주제다. 누군가의 소장품을 극사실 기법으로 정교하게 옮기기도 하고, 위쪽에만 천을 덧대거나 표면에 한국의 산수山水 풍경을 더하는 등 10년 넘게 다양한 ‘백자 회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도예가 박성욱
흙과 소성의 흔적으로 아름다운 백자





도예가 박성욱은 ‘덤벙 분청’ 작업으로 독창적인 미감을 완성한 이다. 도자기를 백토 물에 덤벙 넣었다 빼는 이 기법을 사용하면 백토물과 태토의 변화가 작품 표면에 그대로 남아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데 순백의 백자와는 또다른 매력으로 와닿는다. 박 작가의 포트폴리오는 다양하다. 흑유黑釉로 마감해 언뜻 무쇠 작품처럼 보이는 흑유 주전자부터 여러 형태와 크기의 다완까지…. 달항아리도 주된 작업으로 역시 덤벙분청 기법으로 완성하는데 백토물이 흘러내린 자국, 흙 속 알갱이가 소성 과정에서 튀고 그을리면서 만들어낸 흔적이 지문처럼 담기면서 질박한 기운을 발산한다. 양평 작업실에서 만난 박 작가는 “분청은 백자와 달리 태토에 함유된 철분을 걸러내는 과정 없이 있는 그대로의 흙을 사용한다. 흙의 상태나 성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질감과 무늬가 나오는데 내게는 그런 자취가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일정한 크기로 만든 ‘편片’을 철판에 이어 붙여 달의 연작으로 만들어내는 작업도 완성도가 높다.

디자인하우스 [LUXURY 2018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