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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네 안에 머물러라

다시 한 해가 밝았다. 이맘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하고 막막한 고민 때문에 마음이 시끄럽다. 이런 ‘큰’ 질문은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학문인 철학 분야의 책을 뒤적이기도 한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최진석 교수는 인생을 화두로 오랫동안 구체적이고 명쾌한 답변을 들려준 이다. 속으로 뜨끔해 얼굴이 달아오를 만한 ‘직구’도 서슴없이 날린다.


최진석 16세 때 마당에 깐 덕석에 벌렁 누워 바라본 별똥별의 궤적을 본 후 “내부에 큰 동요가 일며 딴사람이 되어” 생각하고, 사유하며 죽음이나 인생 같은 화두에 천착했다. “읽는 데 힘이 안 드는 것, 재미있는 것, 편하게 나한테 들어오는 것”이 동양철학이라,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거쳤다. 이후 중국 흑룡강대학교와 베이징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장자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간 <인간이 그리는 무늬>, <탁월한 사유의 시선>,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경계에 흐르다> 등을 펴냈다.
최진석 교수는 강연장에서 종종 “내 이름의 뜻은 ‘진짜 돌’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참 진眞’ 자에 ‘돌 석石’ 자를 쓴다는 거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의 말과 글에는 ‘진짜 돌’처럼 단단한 기운이 서려있다. 박력이 넘친다. 칼럼이나 책을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고, 밑줄을 긋고, 페이지 귀퉁이를 접게 된다. 사유의 폭이 넓고 생각도 명쾌하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 왜 책을 읽는가. 내 원초적인 답은 간단하다. 심심해서다. 그러니까, 가장 밑바탕에 있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심심함 때문이다.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다.” “문화와 철학과 예술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그 나라의 높이를 증명한다.” “개인적으로 창의적이지 못하다면, 창의적인 두께의 인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단도직입적’이란 건 이런 걸 거다. 무심코 앉아 있다가 죽비로 어깻죽지를 맞는 것 같은 느낌. 최 교수의 말과 글은 ‘실천’으로 더 큰 힘을 갖는다. 2015년부터 그가 주축이 돼 발족한 교육기관이 있다. 건명원建明苑. 인문학적, 예술적 소양과 깊이를 갖춘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재)두양문화재단에서 만든 신개념의 아카데미다. 그는 ‘그저 그런 사람, 그저 그런 나라’에서 탈피하기 위해 본질적이고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이 화두를 좀 더 강하게 붙들어 매기 위해 지난해 재직 중인 서강대학교에 무급 휴직 신청서를 냈다. 한마디로 그는 ‘행동하는 철학자’다. 건명원에서 만난 최 교수는 “잡지 이름이 아주 좋습니다. 타이틀에서부터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데요”라며 웃었다. 다음 말은 “비도 오고 하니 (인터뷰) 빨리 마치고 집에 갑시다!”였다.

강연을 포함해 일정이 많으실 텐데 인터뷰 요청 메일을 드리자마자 답변이 와 놀랐습니다.
어차피 할 거면 답변을 미룰 필요가 없으니까요(웃음). 빨리 처리를 하고 또 다른 일을 해야 하기도 하고요.

건명원의 중앙 화단이 텅 비어 있던데 장자의 사상을 반영한 것인가요.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산다는 의미) 사상을 반영한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인위적이지 않은 공간도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비워놨습니다. 빈 곳으로 놔두니 매년 자라는 게 달라요. 어느 해에는 풀만 무성하고 또 어느 해에는 나무가 자라지요.

19세부터 35세까지 건명원에 입학할 수 있지요. 주로 어떤 분들이 입학원서를 내는지, 그분들은 건명원을 졸업하고 어떤 진로를 선택하는지, 경쟁률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19세에서 29세 사이의 인재들이 들어옵니다. 건명원을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창의적인 도전을 하도록 배양됩니다. 돈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성공이 아닌 시대의 문제를 돌파하는 새롭고도 높은 수준의 성공을 도모하지요. 경쟁률은 매우 높습니다. 첫해에는 30대 1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률이나 합격률이나 시청률에 집착하는 것을 문제로 보기 때문에 건명원은 경쟁률을 밝히지 않습니다.

건명원에서 원생을 뽑을 때 유심히 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질문을 시도할 만한 기질이 있는지를 눈여겨봅니다. 대답에만 익숙한 사람, 책에 있는 내용을 자기 이야기처럼 하는 사람은 뽑지 않지요. 서툴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개인의 창의력만큼이나 국가적 창의력도 중요하지요. 건명원도 결국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인데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사명이 아닌지요?
창조는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곳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나에서 우리로, 다시 사회와 국가로, 더 나아가 인류와 우주로 사유의 범주와 관심이 넓어져야 비로소 큰 인간이 되지요. 개인이 완성된다는 건 그 안에 우주가 담긴다는 뜻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왜 위대할까요? 세상 모든 인간의 유형을 작품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 동네 사람 이야기만 하지 않았지요. 모든 유형의 인간으로 관심과 사유가 확장된 겁니다. 개인적 역량은 곧 우주적 역량입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를 누가 만들었나요? 예수 혼자 만들었습니다. 중국 통일과 신중국 건설은 마오쩌둥 혼자 했습니다. 큰 결과를 원하면 큰 목표를 세우고, 작은 결과를 원하면 시선을 낮은 곳에 두면 됩니다.

평소 장자를 인류 최고의 철학자로 꼽으시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요?
공자가 근대형 인간이라면 장자는 현대형 인간입니다. 공자는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서 책임감 있는 인간이 될 것인지 설파합니다. 반면 장자는 한 개인이 어떻게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 알려줍니다. 그가 한 상상의 새 ‘대붕大鵬’ 이야기를 보면 철학적 기준과 미학적 높이가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대붕은 원래 작은 물고기였습니다. 깊고 투철한 학습 공력이 극한까지 커져서 질적 전환을 도모하려던 찰나에 수양의 터전인 우주의 바다에 동요가 일지요. 대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9만 리를 튀어 올라 새가 됩니다. 장자의 생각은 이렇듯 크고 혁신적입니다.

중국 흑룡강 대학교와 베이징 대학교에서 공부하셨는데 중국에서 철학의 입지는 어느 정도인가요?
중국에서는 제도권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이도 ‘철학이 국가 발전의 기초다’라는 말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죠. 중국은 철학 생산국입니다. 철학과 문화를 중시하는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철학이나 문화의 수준에 따라 나라가 움직인다고 여기죠. 이것이 중국의 진짜 힘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듯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철학을 왜 ‘무용無用의 학문’이라고 하는지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 당장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는 것은 가치가 있지만 ‘자유’나 ‘학문’ 같은 개념은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지요. 쓸모가 있는 것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입니다. 감각, 경험의 세계와 연결돼 있지요. 철학이 쓸모가 없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에요. 예술이나 세계관, 지식 같은 것은 일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니까요. 하지만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들입니다. 사유의 수준이 올라가면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큰 쓸모가 있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창의적 인간이라고 하면 특별한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인간은 원래 무언가를 만들어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새긴 무늬가 오늘날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겁니다. 창의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교수님은 철학의 효용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철학은 이 세계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보게 합니다. 세계를 수용하는 능력을 키우지요. 이 능력은 곧 개인의 힘이 됩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서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내공’이 생기지요. 하지만 철학책은 어렵습니다. 누군가 재미도 없는 책을 끝까지 읽어냈다면 엄청난 수련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이 한 뼘 커지는 거지요.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국민 1인당 독서량이 국가의 경제력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개개인의 독서량이 많은 나라일수록 부강한 것이지요. 이는 독서를 통해 각자의 지적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생존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에게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듯합니다. 어쩌면 그걸 명확하게 분간하는 것이 ‘지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과도 직결돼 있습니다. 고 3 학생에게는 삼각함수를 푸는 것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는 것보다 더 쓸모 있어 보입니다. 당장 대학에 합격을 해야 하니까 기능적으로 사고하는 거지요. 하지만 인생을 크게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꿈과 삶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지속해서 자기 자신 안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적 시각으로 쓸모 있음과 없음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는 ‘쓸모없는 것’에 있지요. 빌 게이츠의 인생을 봅시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대학을 중퇴하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쓸모없는 일에 몰두한 셈이지요. 당장 오늘 하루를 사는 데만 급급해서는 결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주체적 삶, 얽매이지 않는 삶을 고민하다 보면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제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무엇이 ‘진실’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퇴사를 하려는 건지, 이런저런 인간관계가 피곤하고, 경쟁하기도 힘들어서 현실을 피하고 싶은 건지…. 여기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주체적 삶의 전제 조건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탁월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겁니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욕망을 줄이면 안 됩니다. 독립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곳을 내 길이라 믿고 그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지요. 이런 ‘탐욕스러운 갈망’이 없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님처럼 오랫동안 사유를 체화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문제를 두고 길을 잃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사유와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침에 일어나 ‘나는 금방 죽는다’고 서너 번 중얼거리는 겁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날 하루는 덜 쩨쩨해질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번잡하고 부산스러운 곳에 두는 일도 조금 줄일 수 있지요. 사유의 기반이 약하면 더 자주, 더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흔들리는 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만 그 이유가 주체적 사유의 결과인지 사회적 통념이나 평가, 관점에 근거한 것인지는 들여다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이 허무하다고들 말합니다. 자기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 인생은 허무한 거지’라고 동조하지만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이는 ‘허무로 해석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직시합니다.

명상 외에 오랫동안 즐기는 취미가 있으신지요?
혼자 산에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대한 자연 안에 혼자 있으면 더욱 고독해지는데 스스로 고독을 자초하지 않고는 굵고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철학자라면 자식들이 힘들 것 같습니다. 진지하고 엄격한 선생님과 사는 기분도 들 것 같아요. 자녀들과의 관계는 원만한지요?
하하. 잘 지냅니다. 자식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니 잔소리도 하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조언도 하지 않습니다.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을 가르치고 독서 습관만 들이도록 노력했을 뿐 자식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 저도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대개 부모의 ‘선의’에서 비롯됩니다. 잘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저런 기준을 정해두고 잔소리를 하는데 자식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많은 이가 ‘길’을 찾기 위해 독서를 합니다. 하지만 다독가라고 해서 지력이 높은 것은 아니지요. 독서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일단 자기가 좋아하는 책,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욕적으로 구매했지만 어디에 뒀는지도 모를 책이 우리에겐 얼마나 많습니까? 몇 장 뒤적이다 포기한 책은 또 어떻고요. 하지만 쉽고, 짜릿하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책만 읽어서는 사유의 세계를 넓히지 못합니다. 당장의 시각적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일이 ‘예능’이라면 추상적이지만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전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일이 ‘예술’입니다. 예능 대신 예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철학 책을 읽다 보면 뜬구름을 잡는 듯 모호하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책 읽는 속도가 줄고 결국 다른 책을 찾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탁월한 인간을 ‘은유하는 인간’이라 했습니다. 은유하는 인간이 인간 가운데 가장 세다는 말이지요. 지식과 통찰이 없으면 이런 표현도 할 수 없습니다. 철학 책을 읽다 보면 철학자가 사유한 결과를 사유하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저자가 이야기한 철학적 높이에서 자기가 처한 현실을 들여다봐야 하지요.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면서 읽어야 합니다. 책 속의 길은 저자의 것입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하나의 삶과 생각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지 그 길을 내 삶에 똑같이 적용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한국의 많은 부자가 유럽 여행길에 미켈란젤로를 포함해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한 메디치 가문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순례하듯 자녀를 데리고 가는 경우도 많지요. 메디치가의 위대함에 대해 이탈리아 사람보다도 더 잘 압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자신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지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유가 얕고, 종속적 삶을 살기 때문이지요. 이들에게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동기와 욕망이 없습니다. 수많은 종교서와 철학서가 묻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너는 누구냐!’ 자신을 중심에 놓고 책도 읽고 인생의 방향도 잡아야 합니다.

“깊은 글을 쓸 수 없다면 이유는 하나다. 당신의 인격이 아직 그만한 깊이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는 글을 보고 뜨끔했습니다.
얄팍한 사람의 일상은 부산스럽고 번잡합니다. 깊이가 있는 사람의 그것은 간결하고 단순하지요. 새해를 잘 보내려면 자신을 적막하고 고요한 곳에 두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자에게 장자 책을 추천해주었더니 “교수님, 이제 저도 장자처럼 살아보렵니다”라고 말하길래 혼낸 적이 있어요. “장자가 누구를 따라 산 사람이냐. 장자는 장자처럼 살았고 플라톤은 플라톤처럼 살았다. 너는 너처럼 살면 된다”고 말했지요. 사학자인 함석헌 선생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안의 동굴을 가졌는가?” 내공 있는 글을 포함해 모든 위대한 결과물은 바로 이 ‘동굴’에서 나옵니다.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교수님은 ‘럭셔리한 삶’을 어떤 것이라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는 삶입니다. 내 생활이나 생각, 판단이 다른 사람의 방식이나 환경에 좌우된다면 럭셔리한 삶이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 모두는 내 삶의 입법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그 삶은 럭셔리해집니다. 비교와 잡담, 말장난은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비교는 자신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행위지요. 세상에 좋은 비교가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는 겁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우리 관심은 모두 ‘밖’으로만 향해 있습니다. 남이 먹는 거, 남이 키우는 개, 남이 가는 여행을 보고 즐거워하지요. 남의 인생을 소비하는 것으로는 나의 인생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은 것이 아닌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럭셔리한’ 인생의 핵심입니다.

디자인하우스 [LUXURY 2018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