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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스트리트 패션에 얹은 극적인 우아함

발렌티노 2018 리조트 컬렉션

전설적인 쿠튀리에이자 설립자인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은퇴를 발표하고 브랜드를 떠난 것이 10여 년 전, 8년간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함께했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크리스챤 디올을 맡게 되며 메종을 떠난 지 1년이 다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피엘파올로 피촐리 그의 온전한 컬렉션이다. 누구도 발렌티노나 키우리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오직 그의 아이디어와 영감에 집중해 묻는 2018 리조트 컬렉션은 피촐리에게도, 발렌티노라는 전설적인 메종에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뉴욕 소호에서 펼쳐진 발렌티노의 2018 리조트 컬렉션 키 룩. 젊고 경쾌한 분위기를 기반으로 고급스러운 터치를 잊지 않았다. 
뉴욕 소호에 자리한 ‘O 본드스트리트’ 앞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진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발렌티노 리조트 컬렉션을 선보이는 자리, 전 세계 멋쟁이들이 몰려들 예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유롭고 한가한, 그러면서도 고급스러운 옷들을 선보이는 것이 발렌티노의 ‘리조트’ 컬렉션. 쇼가 시작되기 전 칵테일과 카나페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올해 76세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잔드라 로즈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유명한 진달래색 헤어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엘파올로 피촐리Pierpaolo Piccioli는 지난 시즌에 이미 ‘펑크의 어머니’인 잔드라 로즈에게서 영감을 받은 옷들을 선보인 바 있다. 그녀가 직접 참석했으니 이번 컬렉션에서도 잔드라 로즈의 펑크 스타일을 도입하지 않았을까 기대를 하게 되었다. 발렌티노의 최신 의상을 입고 정해진 자리에 앉은 고객과 셀러브러티, 프레스 상당수가 피촐리와 키우리의 전설을 만들어 준 락스터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 락스터드야말로 메종 발렌티노의 새로운 도약을 알린 성공작이다. 우아함 그 자체였던 로마 브랜드에 강렬하고 시크한 매력을 덧붙임으로 젊은 팬들을 사로잡은 디자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시즌, 피촐리는 어떤 새로운 시도를 보여줄까. 발렌티노와 키우리가 아닌 피엘파올로 피촐리만의 스타일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2018 리조트 컬렉션이다.


컬렉션 의상에는 에스닉한 요소들이 자주 사용되었다.


(왼쪽) 쇼에 참석한 나탈리와 딜라나 수아레스 자매. (오른쪽) 핑크색에 펼쳐진 고급스러운 레이스 장식.


(왼쪽) 발렌티노의 우아한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던 블랙 드레스. (오른쪽) 배우 매기 질런홀과 왕년의 슈퍼모델 헬레나 크리스텐센.
다양성과 자유, 경쾌한 리조트 컬렉션의 정신
럭셔리 패션에 스트리트 감성과 스포티한 요소를 담는 것은 이제 대세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런 요소를 고급스럽게 가져올 아이디어를 거의 모든 브랜드가 고민하고 있다. 피촐리의 발렌티노는 처음에는 스포티한 분위기를 에스닉과 매치했다. 핑크색, 녹색과 자주색을 주조로 제작한 재킷과 가벼운 드레스, 트랙슈트, 실크 저지 이브닝 가운 허리에 드로스트링을 달기도 했고 카키색 유틸리티 재킷에 화려한 자수를 놓기도 했으며 플립플랍과 운동화에 깃털 장식을 달기도 했다. 발렌티노의 새로운 상징이 된 락스터드 스니커즈는 이번엔 흰색! 운동할 때 신을 법한 스포츠 양말을 흰색 스터드가 박힌 샌들에 함께해 경쾌함을 더하기도 했다. 캐츠 아이 메이크업을 한 모델들을 보고 있으니 1970년대가 연상되었다. 자유분방하고 대범한 잔드라 로즈의 1970년대 스타일 카프탄드레스에서 영향 받은 옷도 볼 수 있었다. 피촐리는 거칠지만 생생한 유행, 반항과 유머까지 녹여내는 거대한 문화 용광로인 힙합 문화와 메종의 오랜 전통을 결합시켰다. 어떤 옷이건 최상의 소재, 섬세한 디테일, 화려한 장식과 미묘하게 우아한 실루엣이라는, 발렌티노의 DNA를 잊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인기 있는 스트리트 패션에 고급스럽고 로맨틱한 영혼을 얹는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쇼가 끝나고 관객들은 만족스러운 박수를 보냈다. 이날의 주역인 피엘파올로 피촐리는 긴장을 덜어낸 얼굴로 짧게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전통과 우아함을 자랑하는 패션 하우스, 여전히 건재한 창립자 앞에서 그의 이름으로 컬렉션을 선보여야 하고….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미학적으로도, 비즈니스적으로도 성공적인 평가를 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리조트 컬렉션에서 그는 이 어려운 일을 해낸 듯하다.


1 이번 컬렉션을 위한 메이크업은 아이라인을 극도로 강조해 젊고 강렬한 매력을 전하는 캣츠 아이 룩. 2 흰색 스터드를 응용한 핸드백과 구두 등의 액세서리가 눈에 띄었다. 3, 6 컬렉션의 의상과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무드 보드. 4 진한 핑크에 절개선으로 실루엣을 살린 드레스. 5 스포티한 흰색 양말과 샌들의 조화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7 화려한 코트를 입은 패션 블로거 대니얼 번스타인.




쇼를 위한 준비로 바쁜 백스테이지. 피촐리를 비롯한 스태프의 체크는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스포티한 스트리트 룩과 우아한 클래식 룩의 자연스러운 공존이 이번 컬렉션의 특징이다.
누군가를 꿈꾸게 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발렌티노는 이 시대 가장 우아하고 글래머러스한 삶을 상징하는 브랜드다. 2008년 화려한 오트 쿠튀르 쇼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뒤를 알레산드라 파키네티가 이었지만 두 시즌 만에 떠나고 1999년부터 액세서리 라인을 맡아온 키우리와 피촐리가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8년여 시간이 지나 이제는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이 우아한 메종을 이끌고 있다. 1년 내내 여성, 남성을 위한 오트 쿠튀르와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리조트 컬렉션에 이어 구두와 핸드백, 아이웨어, 향수 등 발렌티노 가라바니 액세서리 라인을 이끌며 때로는 한 달에 3가지 컬렉션을 겹쳐 준비해야 한다. “이탈리아 감독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말했던 것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힘들지 않아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강렬한 열정을 느낀다면, 꼭 휴식을 취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나에겐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해야 한다는 압박을 이겨낼 만한 충분한 열정이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비전을 각각의 컬렉션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각각의 컬렉션은 항상 또 다른 언어, 또 다른 이야기랍니다.” 지난해 미국의 경영 잡지 <패스트 컴퍼니>는 ‘비즈니스에 있어 가장 창의적인 인물’로 키우리와 피촐리 듀오를 선정했다. 예술적 가치를 기반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이끌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패션에서 상업성을 거부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고 스스로 알아차리기 전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임무지요. 패션이란 것이 왜 존재하는지 알게 해주는 것, 단순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게 만들어주는 것이 패션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상업적인 성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유명한 이탈리아 자동차 브랜드에서 일한 나이 지긋한 디자이너는 “예전에는 디자이너가 차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마케터가 차를 만든다”고 통탄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하자 피촐리가 웃음을 지었다. “그거 공감 가는 스토리군요. 하지만 다행히 자동차와 패션은 좀 다르지요. 사람들은 자동차를 일상적으로 늘 강렬하게 원하지는 않습니다. 자동차가 필요하면 차 한 대 사고 그것으로 그만이지요. 물론 옷 역시 늘 새로운 것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름답고 자아의 표현이 되는 옷은 사게 만드는 것.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량이고요. 패션업계에서는 여전히 디자이너들이 옷을 만드니 다행이에요!” 여자들이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낄 때 세상 역시 그 여성을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이 피촐리의 지론이다. 최근 관심의 중심이 되는 디자이너로서, 언론과 패션 팬들이 그에 관해 알지 못하는 것, 놓치고 있는 비밀이 있을까? 그는 소동을 일으키고 과잉된 자의식을 표출하는 타입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늘 조용하고 친절하며 신뢰감을 주는 사람으로 보였다. “저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은 아마 다르게 이야기할 겁니다. 저는 언제나 친절한 사람은 아니에요. 친절하지만 강박이 있다고 할까요. 컬렉션을 준비하며 모든 룩의 모든 디테일을 다 챙겨야 합니다. 각각의 룩은 서로 달라야 하지만 전체 분위기 안에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어야 하고 또 서로 협조해야 하지요. 그러니 모든 것을 완벽한 저의 통제 아래에 두면서 세밀하게 집착하고 강박적이 될 수밖에요.”

또 하나, 그는 열성적인 영화 팬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최근에는 파올로 소렌티노가 이탈리아 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바를 꾸준히 지켜가는 것. 제한을 넘어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지요.” 철학적인 그에게 ‘럭셔리’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에는 문화가 럭셔리예요. 쿠튀르를 이해하려면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문화란 느끼고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이지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대상은 아닐 거예요. 문화적인 삶을 살려면 곁에 있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럭셔리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그 ‘럭셔리’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안목과 의식,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통찰력, 그것이 진짜 럭셔리예요.” 내한 공연에서 한국 팬들의 열성적인 반응에 놀란 미카는 절친한 피촐리에게 “당신도 꼭 한국에 가봐야 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한국 팬의 ‘떼창’이 최고의 디자이너를 초대하는 계기가 되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애프터 파티에는 올리비아 팔레르모, 불가리아 공주 마팔다 섹스, 그리스-덴마크의 마리아 공주 등이 참석했다.


모델 타미 윌리엄스.


파티 DJ를 맡았던 할리비에라 뉴턴.


게스트로 출연한 R&B 여왕 메리 J. 블라이지.

“패션은 보이는 것 너머를 보게 해준다”
저녁 늦게 스탠더드 호텔 꼭대기 붐붐 룸에서는 파티가 열렸다. 진한 청색 스웨터를 입고 런웨이 마지막에 나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들어갔던 피촐리를 보았고 보워리 호텔에서 조용조용 신중하게 질문에 답해주던 피촐리를 만났으며 이제 모든 부담스러운 시간을 뒤로하고 마음 편하게 즐기는 파티, 화려한 디제잉이 이어지는 가운데 흥겹게 춤을 추는 피촐리를 만났다. 어떤 상황이든 그는 별 꾸밈없이 소탈했고 유쾌했다. 스스로 전설이 된 발렌티노와 지금 발렌티노를 운영하고 있는 CEO 스테파노 사시도 연단에 함께 올라 컬렉션의 성공을 축하했다. 그때 메리 J. 블라이지가 깜짝 등장해 U2의 명곡이자 그녀 자신도 앨범에 수록했던 노래 ‘one’을 불렀다. 맨체스터 테러 때문에 더욱 격앙된 사람들은 큰 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렀다. “We’re one, but we’re not the same, We get to Carry each other, Carry each other, One… 같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 그래서 서로를 잡아주어야 해요, 서로를, 우리는 하나니까.”

인터뷰 내내 유난히 ‘자유freedom’와 ‘감성적emotional’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던 그는 이번 리조트 컬렉션에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자유’였다고 답했다. 메리 J. 블라이지가 불렀던 노래 가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변화가 가능해진다.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며 이질적인 것들을 아울러 자신만의 매력으로 만들어내는 여성.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규범에 얽매이지 않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깨어 있는 여성. 취향은 까다롭고 언제나 우아한 여성. 그런 여성들이 선택할 옷을 만들기 위해 발렌티노는 또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디자인하우스 [LUXURY 2017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